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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함형수 - 해바라기의 비명(碑銘)


신경림 시인의 책, 『시인을 찾아서』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시의 분량이 적다해서 별볼일 없는 시인이 아니다 … 시는 질로 따져야지 양으로 따져서는 안 된다 … 그가 남긴 시는 ‘해바라기의 비명’ 단 한 편뿐이지만, 수천, 수만의 시인들 가운데 단 한 편의 ‘해바라기의 비명’이 없는 시인이 허다하다”고 썼다. 

바로 함형수(咸亨洙, 1914∼1946) 시인을 두고 한 말이다. 함형수 시인은 서정주, 김동리와 함께 『시인부락』 동인 활동을 함께 했었는데, 해방 직후 3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 “해바리기의 비명(碑銘)”이라는 시는 1936년 창간 된 『시인부락』에 처음으로 실렸던 시이다. 잊고 있었다가 페이스북 이웃님께서 내 담벼락에 올려주신 덕분에 다시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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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바라기의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 -

- 함형수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碑)돌은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시인부락』, 창간호, 1936년 1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