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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루왁 커피 마신 날에 있었던 큰 누님의 KTX 열차표와 후배들에 얽힌 긴 이야기...



아침에 하지 않으면 안 될 일들이 있어 어제의 숙취가 채 깨지도 않았지만 눈을 부비고 일어나 움직인다고 부산을 떨었다. 타고 다니는 전동스쿠터에 몸을 싣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부산을 떨었더니 일을 다 처리한 시간이 12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엊그제 약속했던 후배와의 점심을 식사를 위해 다시 기숙사로 돌아와 휴게실에 앉아 10분이나 눈을 잠시 감았을까 후배가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눈 또 비비고 일어나 후배 차에 몸을 맡기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이동했다.

후배 녀석 그동안 얼굴 한 번 보자고 그렇게 연락이 많이 왔었는데, 한 번도 응해주지 못해 많이 미안했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시간이 맞아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별거 아닌 것이지만 이동하면서나 식사를 하면서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으며 ‘그동안 많이 힘들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존 제도권에 안착하지 않고 스스로 뭘 만들어보겠다고 길을 새로 나선 지가 1년이 조금 안 되었다. “뭐 먹고 사냐?”는 말에, “형 그래도 잘 살고 있어요”라고 대답하며 껄껄껄 웃는다. “맘 비우고 조급하지 않으려고 하니까 맘도 편해지고 오히려 좋은 것 같아요” 하는 녀석의 말에 맘이 짠해지더라. 

학부 단과대 학생회장 시절, 군대 다녀 왔다는 한 녀석이 그래도 쫄쫄 거리고 쫓아다니고, 임원도 아닌 것이 팔걷어부치고 굿은 일 도맡아 하는 모습이 귀여웠던 놈이었다. 한 번은 학내 사태가 있어, “오늘부터 수업 거부다. 강당에 있는 의자 다 빼와. 운동장에 깔어.” 하고 소리질렀더니 제일 먼저 움직인 놈이 이 녀석이었다. 녀석 뭘 시키면 자기 생각과 맞으면 군말 안 하고 그냥 움직이는 스타일이었다. 가끔 자기와 생각이 맞지 않으면, 혀 짧은 소리로, “에이~ 형 왜 그래요?” 하며 무작정 개기는 면도 있었다. 하여간 말도 많았고 웃기고 귀여운 녀석이었다. 



근데 이 녀석 대학원 진학을 조금 걱정하고 있었는데, 무사히 잘 통과해서 함께 대학원에서 같이 세미나도 했었다. 그 성격 어디가겠나마는 녀석 늘 하던 대로 대학원 와서도 굿은 일 많이 하고 잘 웃었다. 사실 글을 이렇게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글을 쓰면서 자꾸 녀석의 모습이 떠올라 맘이 짠해진다. 어쨌든 식사가 마쳐갈 무렵, “형이 오늘 밥 살테니까 커피나 사. 처자식 딸린 놈보다 혼자 사는 놈이 그래도 여유가 더 있다” 하는 나의 말에 펄쩍 뛴다. “아니에요, 형 오늘 제가 밥 사드리려고 왔어요. 제가 낼께요. 담에 사주세요” 하는 통에, ‘그래, 녀석 자존심 더 갉아먹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잘 얻어 먹었다. 커피나 마시려 가자”고 했더니, “형, 그냥 요 앞에 보면 큰 사찰 하나 있어요. 거기 경치 좋아요. 거기 가서 싼 커피나 마셔요” 한다. ‘무딘 짜슥. 오늘 단단히 결심하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럼 그러자” 하고 다시 차에 몸을 싣고 삼각산(예전의 북한산) 둘레길이 시작되는 길을 따라 산 중턱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드라이브 겸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올라갔다.

아내와 아들과 함께 뭔가 해 보겠다고 움직이는 상황 속에서 책임져야 할 입이 있다는 것이 참 큰 일이라는 것을 속으로 감추고 있다는 것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하는 말이 약간은 빈 말 같지 않아 속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은 몸이 피곤했는지, 오는 내내 잠만 자다가 왔다. 미안하기도 하고, 다시 만나자는 약속과 종종 찾아오겠다는 녀석의 약속을 서로에게 다짐하고 돌려보냈다.

방으로 들어와서는 모든 옷을 훌훌 벗고 샤워실로 직행했다. 샤워를 하고 방으로 돌아오니 저녁 약속에 관한 문자가 한 통 날라와 있었다. 사임한 교회에서 4년 간이나 나와 함께 초등학생들을 가르쳤던 후배 부부를 만나 식사하기로 했던 약속이었다. 또 부랴부랴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렇게 만나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또 다른 후배의 근황을 듣게 되었다.

만난지 6개월이 안 되었는데, 시집을 가려고 한단다. 근데 이 녀석 워낙 똑부러지는 녀석인데, 이 “녀석 답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스스로 원해서 결혼 과정을 밟아 가는 것이 아니라, 속된 말로 “그냥 얹혀서 가고 있는 것 같다”며 후배가 걱정의 말을 전한다. 괜히 또 심란해 지더라. 이건 교회를 사임한 후니 아무리 후배라도 감놔라 배놔라 할 수도 없는 처지니, 아직 그 교회에 남아 있는 후배 전도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결혼이라는 것이 뭔가 싶더라. 만나서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하는 것이 상식이라고 하지만, 딱히 그런 상식에 들어맞지 않는 상황이 있다는 것은 이 또한 일상적인 것이라 놀랍지도 않지만, 후배 녀석이 그러고 있다니 답답하기도 하고. 하여간 식사를 마치고 커피 한 잔 할까 하는 생각을 했는데, 마침 어제 기숙사로 배달되어 온 최고가의 커피라고 하는 인도네시아 산(産) Luwak(루왁) 커피가 생각나 기숙사로 가자고 했다.



루왁이라는 말은 인도네시아 말로 “사향 고양이”라고 한다. 커피 열매를 먹은 사향 고향이가 배설한 것을 깨끗하게 씻고 잘 말려서 만들어내는 것이 루왁 커피라하고 한다. 그러니 대량 생산은 힘든 것이 사실이고, 대량 생산된 것들은 사향 고향이를 방목하지 않고 우리에 가두어 키우며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직거래를 하게 된 농장주는 사향 고양이를 방목해서 키우며 생산한다고 한다. 뭐 믿거나 말거나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하여간 그렇게 해서 독일 쪽과도 직거래를 하고 있는 농장주라고 한다. 

어쨌든 어제 배달되어 왔지만 이리저리 딴 거에 정신이 팔려 아직 시음도 못하고 있다가 마침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후배 부부한테 가자고 했던 것이다. 워낙 방이 깨끗한 관계로 먼저 가서 약간 어질러 놓겠다고 하고 먼저 전동스쿠터를 몰고 기숙사 방으로 돌아와 방을 닦기 시작했다. 늘 하던 대로 보이는 부분만 살짝살짝 닦았다. 그렇게 들이닥친 후배 부부네와 루왁 커피를 내려마시는데, 향이며 맛을 보며 “이래서 비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비싼 루왁 커피를 언감생신 맛이나 볼 수 있을 줄 누가 알아겠는가? 친구 잘 둔 덕에 인도네시아에서 직접 커피를 생산하는 농장주와 직거래를 위해 보내 온 루왁 커피를 요즘 유해하는 페이스북에 그룹을 하나 만들고 일단 지인(知人)들에게 부터 판매하기로 하고, 보내 온 1차 분을 판매하기 시작하는 것을 구입하게 된 것이다. 가격을 여기 적으면 아마 이 커피에 관심 있고 한국에서 유통되는 루왁 커피를 구입한 사람은 졸도 하고 쓰러질만큼의 가격이다.

어떤 한 원산지 생산품의 가격이 얼마나 중간 마진이 심하고 거품으로 부풀려지고 유통상들이 이득을 챙기는지 또 한 번 알게 되고는 질식할 뻔 했다. 무역이라는 것이 도대체 뭔지 참 모를 일이다. 그러니 결국 생산자들에게는 돌아가는 것이 거의 없고 중간에서 유통하는 유통상들이 얼마나 그것을 자신들의 이득으로 챙기는지를 또 한 번 확실히 알게 되면서 욕부터 튀어 나온다.

어쨌든 나 자신도 막 입이고 싼 입이라 크게 느끼는 바가 없지만, 확실히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커피의 신 맛과 쓴 맛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굉장히 부드럽고 향이 정말 쓰러지게 좋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래 이런 좋은 커피를 가진 자만 먹는다는 것은 죄야”를 속으로 연신 외치며 “공정무역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커피 향과 맛에 온 몸이 잠겨갈 때쯤 후배 부부 돌아가고, 또 다른 후배 찾아와 거의 두 시간이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 후배 녀석도 설움이 많은 녀석이기는 하다. 구구절절 하고 싶은 이야기 다 쏟아내고 서로 낄낄거리며 뒷담화 안주 삼아 두 시간을 떠 들었더니 진이 다 빠진다. 알게 모르게 살아가는 삶의 환경에서 차별 아닌 차별, 배제 아닌 배제를 당해 본 사람이라면 느끼는 것들이 많았다. 그런 것들을 누구에게든 말하고 살아야 하는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가끔 이렇게 운떼라도 맞으면 서로 격렬하게 쏟아내는 것이다. 하여간 웃긴다.

그렇게 후배 녀석 방으로 돌아가고 책이라도 뒤적거려 볼까 하는데, 큰 누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일 부산에 내려가신단다. 열차표 때문에 전화를 하신 것이다. 큰 누님과 내가 딱 10년 터울이다. 이제 큰 누님의 나이가 지명(知命)이 되신 것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어려운 가장 형편 때문에 큰 누님과 둘째 누님은 더 이상 학교 진학을 하지 못하시고 공장으로 일하러 가셨다. 누님들 자랄 때야 뭐 대수로운 일도 아니었지만, 나로서는 그 내 책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아들이라고 태어난 것이 덜커덕 병신이 되었느니. 나 두 살 이후로 어머님은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다니시고 좋다는 약은 다 먹여주시고. 그러니 그 형편에, 그 가정에 뭐가 남았겠는가? 그러니 누님 두 분은 더 이상 학업을 하실 수 없었겠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면 내 책임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가장 큰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큰 누님과 둘째 누님께는 늘 죄스럽다. 둘째 누님은 그나마 공장을 다니면서 야학을 다니시며 공부를 하시고 검정고시를 치뤄 고등학교 졸업장도 받으시고 책을 좋아하셔서 책을 읽으시는 덕에 글을 잊어버리지 않으셨다. 한 번은 둘째 누님께서 나를 업고 둘째 누님께서 공부하시는 야학 장소로 나를 데리고 가셨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아주 깊은 밤은 아니었지만, 그 밤에 공부를 위해 모여드는 둘째 누님 나이 또래 혹은 더 많은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배움이 한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느낀 때였다.

하지만 큰 누님은 반향끼가 많으셨다. 사실 아버님도 큰 누님을 많이 좋아하셨지만, 큰 누님은 이런 저런 사정의 가정이 싫으셨던 것 같다. 그러고는, 내가 기억하기로는, 고등학교 나이 즈음에 서울로 가출 아닌 가출을 하셨고 일찍 서울에 정착을 하셨다. 그리고 부산에서 다니시던 옷 공장에서 배운 기술로 서울에서도 옷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가끔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내려 온 누님을 만나는 것이 명절의 큰 일이었다. 그렇게 내려온 누님과 또 한 판 하는 것이 우리 엄니의 일이기도 하셨다.



어쨌든 그렇게 살아 온 큰 누님은 전자 제품이나 글씨를 어려워하신다. 작년 초에 큰 누님께서 “넷북이 필요하다”고 하시며, “어떻게 하면 되냐”고 하시길래, 넷북도 구입할 겸 누님이 원하시는 대로 인터넷도 할겸 해서 모 회사에서 판매하는 무선인터넷과 넷북을 함께 구입했다. 처음에 넷북을 만져보시면서 신기하기도 하시고 난감해 하기도 하셨다. 그리고 문제만 생긱면 나한테 전화를 하셨다.

내가 한 가지 나쁜 버릇이 가족이 뭘 몰라 물어보면, 대뜸 화부터 내며 “그것도 몰라” 하며 버럭 소리를 친다. 뭐 가족들 사이는 다 그렇다는 말을 많이 듣지만, 늘 “왜 그렇지?” 하는 생각을 해 보곤 했다. 오늘 누님의 전화를 받고는 “가족이 뭘 모른다는 것이 왜 화가 나는 일일까?” 하고 다시 한 번 곰곰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고 나는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해 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화를 낼 때 내 마음은 ‘안타깝고’ 그렇게 모른다는 것이 ‘내 책임은 아닐까?’ 하는 마음을 숨기고 싶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가족 중에서 제일 가방끈 길다는 것이 나에게는 늘 죄송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어려운 가정 형편에 넉넉해서 한 것이 아니라 꾸역꾸역 하겠다고 그렇게 몸부림치니 가족들이야 어떻게 하겠는가, 그저 저 하고 싶은대로 내버려두고 필요할 때 필요한 대로 다는 아니지만 이래저래 도와주신 것이다.

이렇게 철없이 굴고 살았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맘 한 구석은 늘 죄송스러웠던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걸 숨기고 싶어 그렇게 화를 내고 소리를 치며 살았구나 했다. 열차표 때문에 전화하신 누님께 오늘은 내가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로 차분하게 누님의 일을 도와드렸다. 그래 이게 정상인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동안 왜 이렇게 못했지 하는 생각을 하며 괜히 또 죄스러워진다.

아침부터 부산을 떨면 움직였더니 하루가 이틀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러니 생각도 많아지고 겪은 일들이 한 다섯 배는 많은 것 같이 느껴진다. 그러니 글고 겁나게 길어진다. 이렇게 나를 써 가는 일이 쌓이면 쌓일수록 어쩌면 내 얼굴에 이제서야 책임을 지게 되는 것 같다는 우습지도 않은 생각을 또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