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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사진, 미술관 그리고 피에르 부르디외...



아직도 잘 모르기는 매한가지고 글이라도 하나 써 볼 양이면 책을 뒤적거려야 하는 것이 현실이지만, 철학 공부를 해 가면서 나에게 해방감을 안겨 준 학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프랑스 철학자 “Michel Foucault”와 “Pierre Bourdieu”였다. 푸코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어떻게 역사적으로 형성되어 왔는지를 역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부르디외는 그것이 작동하는 현실 세계의 작동방식을 사유하도록 가르쳐 주었다.   

이제부터 쓰고자 하는 글은 최근에 한 가지 촉발되는 계기가 있어서 부르디외가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한 가지 이론을 가지고 그러한 계기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사진과, 큰 맥락에서는 박물관으로 정의할 수 있는, 사진을 전시해야 하는 공간으로서의 미술관에 관한 것이다.

일단 지금부터 쓰는 글은 박물관으로서의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한 것과 미술관이 그 사회에서 어떻게 예술 개념과 조화되고 투쟁하는 기관으로 작동하는 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진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시 한 번 써 보고자 한다. 물론 모든 귀차니즘을 극복해야 가능한 것이다.   

먼저 미술관이라는 공간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미술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개념으로 정의할 수 있겠지만, 재미있는 개념으로 정의한 것이 있어 소개해 본다. 즉 미술관을 사회적 행위자(Social Actor)의 개념을 정의한 것이다. 이 개념은 2004년 『캐나다 국제박물관협회보』(ICOM Canada Bulletin) 11월호(pp. 1-2)에서 다루어졌다. 이 글에서 엘렌 페이지(Hélène Pagé)는 “Museum as Social Actor”라는 짧은 발제문을 통해 박물관의 사회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사회적 행위자가 되는 것은 구체적 행위를 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② 이러한 행위들은 본성상 사회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회를 향해 작용한다. ③ 사회적 행위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정보를 제공하고 동기화하며, 교육하고, 동원한다(mobilize). ④ 사회적 행위자가 된다는 것은 변화하는 사회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함을 의미한다. ⑤ 모든 사회는 변화한다;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그러한 변화의 적극적인 일부가 될 것이냐, 혹은 단지 그것을 수동적으로 겪을 것이냐를 결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⑥ 박물관은 중립성 주장 아래서 어떤 상징이나 기호의 재현을 속이거나 감춘다면 정당하게 사회적 행위자라고 불리어질 수 없다. ⑦ 이것의 기능에 의해서 박물관은 과거에 그래왔고, 현재 그러하고, 미래에 그러할 것들에 관한 기호와 흔적, 그리고 상징을 선택한다. 박물관은 이러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회적 변화에 대한 지표이다.  


페이지는 이 글에서 박물관을 기능주의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다. 즉 박물관이 한 사회 속에서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대한 평가는 미루기로 하고 단지 이러한 개념 정의만 눈여겨보자.   

그리고 페이지의 이러한 정의를 기억하면서 궁극적 관심인 미술관에 대해서는 페이지가 지적한 박물관을 미술관과 치환시켜도 별무리는 없어 보인다. 미술관이란 ‘미술 박물관’을 의미하며, 박물관이 포괄적으로 수집 연구할 수 있는 대상을 ‘미술에 관한 자료’로 한정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사회적 행위자’라는 개념은 말 그대로 사회 속에서 또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하는 행위자들을 이야기한다. 이러한 상호작용 속에는 하나의 살아있는 전체로서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상호간의 기능적인 조화와 협력이 포함된다. 그러나 동시에 사회공간은 경쟁과 투쟁의 지평이며, 사회적 행위자들은 이 투쟁의 공간 속에서 무엇보다 적극적으로 자기이해를 관찰함으로써 제도적 위치를 확보하려는 실천자가 된다.

사회적 행위자로서 미술관은 경제적・정치적 대립과 연동하는 역동적인 문화 공간 내에서 정당한 경쟁을 통해 상징자본을 축적해 나감으로써 그 자체의 제도적 위치를 확립하려는 실천의 주체이다. 사회적 행위자로서의 미술관은 단순히 사회의 안정과 유지를 위해 특정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구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의 역동적인 변동과 전복, 그리고 재구조화를 초래하는 문화적 실천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제 부르디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부르디외는 특정한 미학적 인식이나 이론이 예술작품을 규정한다는 것을 거부한다. 그 대신에 예술 개념의 역사와 제도의 역사가 맞물려 돌아가는 지점에 관심을 갖는다. 부르디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즉각적으로 의미와 가치가 부여된 것으로의 예술작품의 경험은 역사적인 동일한 제도의 두 면 사이의 일치의 효과이다. 그 두 면이란 상호적으로 서로를 설립해 준 교양 있는 아비투스(Habitus)와 예술 장을 말한다.”

즉, 특정한 개념이나 요소가 예술의 본질로 주장되고 보편화 되는 과정으로서의 아비투스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조건으로서의 장의 생성과 발전을 동시에 고려하자는 말이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은 곧 세계를 향한 몸으로 체득된 이해이며,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각자의 행위를 일으키고, 그것을 사람들과의 행위와 조율하는 원칙이다. 이 원칙들은 일종의 일관성을 띠면서 지속되는 습성(habit)의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아비투스는 따라서 구조화된 성향(disposition)을 말하며, 부르디외는 이것을 ‘실천의 논리(logic of practice)’로 명명했던 것이다. 아비투스는 지속적이며 보편적인 실천의 조직 원리이다. 아비투스로서의 예술계는 매 순간의 실천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지만, 그 모든 순간적 차별성을 하나의 보편성으로 관통하는 실천의 구조적 원칙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특정한 예술이론이 아비투스로서 사회적 행위자들의 이해와 육체화되는 과정은 어떠한가? 이러한 물음에 대한 설명적 대답은 부르디외에 있어서 또 하나의 중요한 개념인 ‘장(field)’의 도입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장은 (개인들 또는 제도들에 의해 점유되어진) 위치들(positions) 사이의, 객관적인 관계들-지배 또는 종속의, 협력 또는 대립-의연결망이다.” 

부르디외의 이론에서 아비투스와 장 개념은 일종의 결합된 요철처럼 서로 강화하면서 완결된 설명구조를 이루고 있다. 만약 육체화 된 예술계, 즉 아비투스로서의 예술계가 가능하다면, 오직 그 아비투스가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 속에서 객관적 구조와 만나는 지점인 장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가 사용한 용어 가운데, 하나는 “눈”, 혹은 “시선” 그 자체일 것이다. 예술작품을 규정하고 분별해 내는 ‘시선’은 일종의 미적 성향, 즉 아비투스이다. 부르디외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눈이 그 시대 그 사회가 제공하는 “특수한 훈련의 조건들, 일찍부터 자주 미술관을 드나들고, 학교교육과 특히 여가의 한 형태로서 스콜레(skkolé)에 대한 장기간의 노출, 그리고 그러한 훈련이 가정하는, 제약과 생계의 위급함과의 거리(감) 등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즉, 아비투스로서 작가의 눈은 예술가들을 생산하는 객관적 조건 및 장치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장치들은 작가뿐 아니라 관객에게도 그 대상들을 예술작품으로 볼 것을 강요하며, 학습시키는 또 다른 장치들과 연결된다. 이 객관적 장치들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특정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서 특정한 예술적 아비투스를 만들어 내는 객관적 조건을 형성한다. 

아비투스와 사회구조가 만나는 접점에서 형성되는 이 조건들이 바로 ‘장’이며, 예술 장에는 “전시 장소들(화랑, 미술관 등), 신성화 기관들(아카데미, 살롱 등) 생산자의 재생 기관들(미술학교들 등), 특수한 행위자(상인들, 비평가들, 예술사가들, 수집가들 등)”가 포함된다. 여기서 미술관의 사회적 위치와 기능에 관한 함의는 보다 분명해진다.

즉, 미술관은 “예술가의 가치와 그의 생산물들의 가치에 대한 특수한 척도를 부여”하며, 또 그 척도를 당연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눈-아비투스’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요소이다. “미술관을 통하여 예술작품들에게 수여된 신성한 것의 위상과 예술작품들이 호소하는 신성화하는 성향이 주장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된다.” 사회적 행위자로서 미술관은 예술작품에 대한 체화된 이해로서 아비투스와 예술 장의 호응하며 교차하는 지점에서 예술에 관한 규범을 만드는 실천자이며, 여기에 참여하는 사회적 행위자들에게 특정한 방식의 예술생산과 소비를 “물속의 고기처럼” 자연스럽게 믿고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간단해 진다. 부르디외의 논리를 따라가 보면 미술관은 주체이며 실천가이다. 그 시대의 예술작품의 개념을 유포시키는 동시에 투쟁하는 장이 된다. 그 미술관의 개념에 합치되든지 투쟁하든지. 여기에 예술가들의 조화와 투쟁이 들어가게 된다. 어떤 공간에 어떤 전시를 할 것이냐? 투쟁의 위치가 재조정된다. 미술관과 사회의 투쟁도 있지만, 미술관과 예술가들의 투쟁도 분명하게 눈여겨봐야 한다는 점이다. 물론 이때의 예술가들은 그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예술 아비투스에서 벗어난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머리 속에 떠오르는 최근의 사람이 하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