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으로부터의 사색

외계어가 지구어가 되는 순간


2006년 초에 오른쪽 어깨 인대가 끊어지는 통에 국립재활원에서 하루 이틀을 뺀 3개월 간의 병원 생활을 했었다. 병원생활은 어릴 때부터 밥 먹듯이 해왔던터라 별 다를 것도 없었다. 하지만 “쟤는 입원을 왜 했데?” 하는 말과 그렇게 멀쩡해 보이는 덕에 나보다 몸 상태가 힘든 동생들에게 형, 오빠 노릇을 해야 했다.

어쨌든 입원을 하든 통원 치료를 하든 병원이라는 곳에서 늘 짜증이 나는 일은 뭔 이야기를 하는지 못 알아 듣는 것이었다. 의사가 외계어가 아니라 지구어로 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나마 병원을 내 집 알듯이 했던터라 똑같은 외계어는 익숙해져서 그렇구나~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국립재활원에 입원해 있을 동안 정말 하도 심심해서 병원 내 도서관을 갔던 적이 있었다. 이래저래 책장을 둘러보다가 그때까지 드라마 제목인줄 알았던 Grey Anatomy라는 책이 보이길래 으잉? 했었다. 그렇게 책을 발견한 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이 책이 의대생들에게 거의 교과서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날 이후로 나의 충만한 똘끼가 발휘되기 시작했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내 몸에서 가장 힘든 정형외과나 내과쪽 용어들은 좀 알아야겠다.”는 마음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을 찾아가 죽돌이가 되었다. 뼈따구 이름들, 근육의 이름들과 내장 기관들의 이름들을 옆에 사전 끼고 알아갔다.

근데 이 놈의 이름들은 뭐시 전부 그리스어 아니면 라틴어고 거기에 영어도 어렵고 나중에는 그림책 보듯이 했다. 그 머리 좋은 의대생들이나 보는 책을 전공하지도 않는 내가 보겠다고 덤볐으니 안 힘들었겠나 말이다. 그래도 이해는 못할지언정 끝장까지 훑어봤다는 만족으로 끝냈다.

신기한건 그렇게 보고 나니 의사들의 말이 더 이상 외계어로 들리지 않더라는 것이다. 누가 내 귀에 통역기 꽂아준 것도 아닌데 “저거 지금 내 척추 이야기 하는구나” 하는 번역이 되더라는 것이다. 그 이후로는 왠지 모를 안정감을 갖을 수 있었다.

사람 앞에 두고 의사들끼리 뭐라 뭐라 할 때는 “뭐가 안 좋나?” 하는 알 수 없는 공포심마저 느끼곤 했었는데, 조금씩 알아들을 수 있으니 그런 공포심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못 알아듣는 말이 태반이지만 그렇다고 공포심을 갖을 정도는 아니다. 그 책을 읽었던 가장 큰 수확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든 생각이 병의 정확한 상태를 환자에게 모두 자세히 일러준다는 것이 때로는 불필요할 때도 있고 오히려 근심만 쌓이게 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이 환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자신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권력으로 작동한다는 오명을 쓰지 않으려면 말이다. 푸코 엉아가 그렇게 떠들었던 권력체계가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 책을 읽은 이후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의학서적들 중에 우리 말로 번역된 주요 서적이 많이 없단다. 이것 때문에도 혼자 속으로 욕을 한적이 있었다. “식민지 수입 학문”을 할 수밖에 없는 더러운 현실이치만 참 지랄맞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 현실에 누구 하나 반기를 드는 사람도 못 찾은 것 같고 말이다.

어쨌든 병원을 들러 돌아오는 길에 비를 피한다고 마트 야외 매장 천막 밑에서 별 놈의 생각을 다해보고 있었다. 지식은 권력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데 이용될 때 빛이 나기 마련이다. 푸코 엉아의 비판이 틀렸음이 증명될 때 말이다.

이제 좀 비가 사그라진다. 올라왔던 분노도 사그라졌으면 좋겠다. 닝기리.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