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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아버지 많이 죄송합니다...



프로이트 이후로 정신분석학의 큰 화두는 아버지이다. 아직도 크게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다.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가 많은 부분에서 비판을 했지만, 딱히 이것을 뒤집을 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시골에서 자라시고 이농현상이 한참일 무렵 울 아버지와 어머님도 그 도도한 대열에 합류하셨다. 시골에서 자라신 분들이 뭔 특별한 기술이 있으셨겠나? 아버님은 소위 노가다꾼으로, 어머님은 김밥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셨다. 내 기억으로는 아버님은 내가 중학교 즈음까지 노가다꾼으로, 어머님은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즈음까지 김밥 장사로 일을 하셨다. 이후에 아버님은 자동차 가스 충전소에, 어머님은 옷을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하셨다.

두 분 모두 성실하시기로는 우리나라에서 경쟁을 하셔도 앞에서 첫째, 둘째 하실 분들이었다. 아니 그 시대에 그렇게 살아가셨던 우리의 아버님, 어머님이 다들 그러하셨다. 그렇게들 일하시고 당신의 자식들이 당신의 전철은 밟지 않기를 원하시며 그 모든 힘듦을 온 몸으로 감당하셨던 분들이었다.

그렇게 살아가신 아버님에 대해 아직도 기억에 남는 것은 아버님의 술주정이었다. 어릴 때 아버님께서 술을 드시면 죽을만큼 싫었던 것이 아버님께서 술만 취하시면 했던 이야기 또 하시고 또 하시고 하는 버릇이셨다. 그리고 늘 반주를 좋아하셨다.

반주라는 것이 식사를 하시면서 술을 한 잔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난 그것이 그렇게도 싫었다. 제발 식사만 하시면 되지 꼭 그렇게까지 술을 드셔야 할까 하는 생각이 늘 들곤 했었다. 지금에서야 완벽히 이해하는 것도 아니지만, 노가다라는 것이 워낙 힘든 일이니 그 힘듦을 어떻게 잊으셨겠는가 하면 바로 술이셨던 것 같다.

내 또래 혹은 그 앞뒤로의 선후배들이 방학이면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 중에 가장 돈이 되는 직종이 노가다였다. 하지만 이 노가다라는 것이 워낙 힘든 것이라 시작하기는 많이 하지만 끝나는 것도 금방이었다. 끝나는 것이 아니라 중도 포기였다. 후배 녀석들도 그렇게 노가다를 시작하지만 힘들다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끝내는 일들이 허다했다. 그러면서 녀석들이 꼭 하는 이야기가 술 없으면 힘들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아버님께서 하루 이틀 노가다를 하셨던 분이 아니셨기에 어느 시기까지는 그 힘듦을 술로 달래셨겠지만, 그 어느 시기 이후로는 술을 술을 마시는 경우가 되셨던 것 같다. 그리고 내 핏속에 흐르는 사람에 대한 애정은 모조리 아버님께로부터 물려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버님께서 사람들과 어울려 술 드시기를 좋아하셨다.

어릴 적 기억 하나는 아버님께서 제법 노가다 판에서 일을 잘 하셨던 것 같고, 소위 노가다 십장 되시는 아버님의 친구 두 분으로부터 동시에 일을 맡으셨던 사건이었다. 아버님이 한쪽 일을 맡으셨는지는 잘 기억이 없지만, 아버님 친구 두 분이서 집으로 동시에 찾아오셨다. 그리고 서로 아버님이 당신들 쪽으로 꼭 오셔야 하는 것을 당신들 둘이서 막 이야기 하시기 시작했다.

결국 언성이 높아졌고, 원래부터도 서로 친하던 분들이라 싸우는 장면을 보다 못한 아버님께서 그러면 아무데도 안 가시겠다고 하셨더니 싸움이 그쳤던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그때 속마음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없지만, 무의식적으로야 아버님이 저 정도였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아버님을 생각하면 뚜렷하게 기억이 나는 장면이, 일을 마치시고 늘 얼큰 한 상태로 들어오셨던 것이 다반사였다. 그것도 같이 일 하는 친구분들과 말이다. 어느 날은 아버님의 친구분이 아버님을 욕 하시거나 조롱하시러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하셨던 이야기가 "이씨한테 술 얻어 먹는 것은 쉬워"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 말에 어머님은 아무래도 술 드시는 것이 싫고 또 싫고 하셨는데, 속된 말로 기껏 술 사먹였더니 그 딴 소리나 듣는다고 아버님을 한 판 뒤집으셨던 적이 있다. 딱히 아버님은 변명도 못하시고 쩔쩔매도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그리고 아마 술에 얽힌 최초이자 마지막 기억은 술과 친구를 좋아하셨던 아버님께서 쉬시는 날 술을 드시겠다고 나가시려는 것을 어머님은 극구 말리시기를 시계를 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제법 한 시간 가까이를 그리하셨던 것 같다. 어머님의 요지는 술 먹는 돈 아껴서 집 살림 제대로 하자는 것이었고, 아버님의 요지는 그깟 술 먹는 돈 얼마되겠냐며 친구들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결국 언성이 높아졌고, 급기야 아버님은 어머님께 손을 올리셨다. 어머님은 우셨고 아버님은 결국 술을 드시려 나가셨다. 사실 이 기억이 아버님과 술과 관련된 첫 기억이다. 앞에서 열거한 것들은 다들 이 사건 이후에 일어난 일들이었다. 결국 내 기억에 아버님과 술에 관한 가장 강렬한 기억은 이 기억이다.

그때는 초등학교를 들어가기 한 참 전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많아야 5살 정도었던 것 같다. 이렇게 생각되는 이유가 그 당시를 떠 올려 보면 내 동생에 대한 기억이 없기 떄문이다. 녀석이 지금 37살이니 나와 3살 차이가 있으니까 그때 내가 5살이었으면 녀석이 2살이었을 게다. 그러니 내 기억이 녀석이 있겠나 싶다.

하여간 이런 저런 아버님과 술에 얽힌 기억들이 좋은 것이 없으니 초중고를 거쳐 자랄 때 술에 대한 내 태도야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웃기는 것은 이런 술에 대한 내 태도가 모조리 박살난 것이 대학을 입학 한 후였다. 어릴 때보다 더 짧은 거리의 기억인데 대학을 들어가고 어떻게 술을 처음 먹게 되었는지 기억이 없다. 그저 내 대학 생활은 술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밖에는.

사실 지금도 술이라면 지겹도록 마신다. 엊그제 일요일 저녁도 필름이 아예 없을 정도로 마셨으니. 어쨌든 대학생일 때건 지금이건 분명한 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밥은 밥이고 술은 술이었다. 물론 식사를 한답시고 그 흔한 삼겹살을 먹으려 갈 때는 밥을 먹는다는 생각이 아니라 술을 먹는다는 자세로 임했다. 그건 밥이 아니라 술을 먹는 자리어야 한다는 다짐이었다.

그리고 원칙 아닌 원칙이 죽었다가 깨어나도 혼자서 술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술을 좋아하고 술 먹고 돌아다니지만 혼자서 술은 먹어 본 적이 없다. 보리차 한 캔도 먹어 본 적이 없다. 혼자서 먹는 보리차도 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여간 이상한 인간이다. 혼자서 술 먹는 날은 내가 아마도 알콜 클리닉 들어가는 날일게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 원칙은 깨고 있지 않다.

근데 요즘 들어 이상하게 밥은 밥이고 술은 술이라는 원칙이 점점 모호해지기 시작했다. 기숙사 식당에서 먹을 때야 없어서 못 먹지만 식사를 나가서 하게 되면 이상하게 꼭 술을 한 잔 하게 된다. 가볍게 마시면 그저 한 두 잔이고 많이 먹게 되면 뭐 그 날은 아예 술 먹는 날이 되는 것이고. 그런데 아예 술 먹는 날은 적어지고, 그저 가볍게 증류수 한 두 잔 혹은 증류수 반 병이나 한 병은 가볍게 먹고 들어 온다.

오늘도 형님 한 분과 동생 두 명과 조금 특별한 것이 먹고 싶어 외출을 했다. 특별한 음식이라고 해 봐야 1인당 8천원이 조금 넘는 샤브샤브 체인점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려고 할 때, 그래도 왔는데, 분자 한 잔은 해야지 않겠냐며 늘 자주 같이 마시는 후배 녀석과 뜻을 맞췄다.

그런데 거의 분자도 비어가고 밥도 비어갈 무렵, 비어 있는 분자 병을 바라보며, 아~ 아쉽다는 탄식과 함께 결국 증류수 한 병을 주문하고 홀짝 홀짝 반 병을 먹어 치우고 왔다. 분자를 즐겁게 마실 무렵 함께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즘은 이상하게 반주를 하게 된다는 말에 동행한 형님께서 나이 드는 게야 하는 이야기에 정신이 번쩍 들며, 아~ 그런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증류수를 혼자 마시면서 생각났던 것이 바로 지리멸렬 하게 나열한 아버님에 대한 기억들이었다. 이런 내 자신의 모습이 아버님 덕이라고 회피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렇게 아버님께서 살아가신 삶의 한 구퉁이에서 술로 삶의 애달픔을 달래셨던 것이 그냥 요즘은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누님 네 분을 낳으시고, 기억에 남아 있는 장면이 하나도 없는 할머님의 요청과 부모님의 의기투합으로 낳았던 생명이 나였는데, 어느 날 이유도 알 수 없는 고온에 시달리고 난 후로는 걷지는 못하고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아들 녀석을 바라보며 심정이 어떠셨을까 싶다.

경제개발이라는 미명으로 농촌 수탈을 자본 삼아 국가 개발을 밀고왔던 시대에 고향을 등지시고 들어보지도 못한 도시 한 구퉁이에 정착하셨지만 병신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짊어지게 된 삶의 무게를 술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견디셨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렇게라도 달래셔야 했고, 살아가셔야 하지 않았을까 한다.

이제사 돌이켜 보지만 그런 아버지의 무게를 덜어드리지도 못했고, 술 잔 한 잔 기울이지 못했던 것이 못내 아쉽고 서럽기만 하다. 그러면서 술을 마셔도 늘 맘 한 켠이 서럽고 아쉬운 것이 이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아버지 많이 죄송합니다. 편히 쉬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