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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이제 다시 하버마스를

사회비판이론은 사회의 병리적인 현상을 폭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에 대한 극복 방안, 즉 사회가 사회의 병리를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을 제시해야 한다. 이러한 규범적 비판의 정신은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에서부터 악셀 호네트(Axel Honneth)에 이르기까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은 사회의 병리를 폭로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규범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규범적인 계기를 갖기에 말이다.

결국 사회비판이론은 사회의 병리를 인식함에 있어서, 그러한 병리를 경험적으로 해명한다는 점에서 경험적 성격을 가져야 한다. 동시에 사회의 병리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적인 방향성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규범적 성격을 또한 지녀야 한다. 이런 경험적 계기와 규범적 계기 모두를 포함하지 않을 경우, 사회비판이론은 두 계기 중 한쪽에만 치우치게 됨으로써, 극단적인 상대주의 혹은 초역사적인 보편주의로 경도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회비판이론이 경험적 계기, 즉 문화, 사회적 차이나 역사적인 특수성에 근거한 사회의 병리 현상을 포착하는 것만 몰두하게 된다면, 각각의 문화·사회적 맥락에 따른 극단적인 상대주의 이론이 된다. 이와 달리 사회비판이론이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피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규범 제시에만 초점을 둔다면, 그것은 문화적 차이나 역사적 특수성을 포괄하지 못하는 초역사적인 보편주의 이론으로 전락한다. 위험한 줄타기를 해야 하는 극한의 이론적 작업이다.

이미 몇몇 남조선 학자들 중에는 비판이론을 말아먹은 학자들도 보인다. 내가 보기에는 사회적 병리현상을 완전히 잘못 해석해서 그 사단이 난 것 같다. 거기에 자신의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여기 붙었다가 저기 붙었다가 완전히 갈지자 걸음을 하는 학자를 한 둘 목격한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하버마스와 푸코가 남조선 지식 지형도를 뒤바꿀만큼 회자될 무렵, 나도 그 흐름의 끝물에 올라타 이것저것 책들을 읽어봤다. 이해는 못해도 멋있기는 하버마스의 이론이 훨씬 그럴싸해 보였다. 결정적으로 공론장의 구조변동이라는 단어가 주는 그 휘황찬란함에 정신이 살짝 외출하는듯 했다.

그런데 남조선 사회를 아무리 뜯어봐도 남조선 사회는 공론장이 형성된 적도 없었고, 그러다가 구조변동을 겪은적도 없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시민혁명이 완성되어 권력 자체의 변동을 완성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4.19혁명, 87년 대투쟁 등이 과연 성공한 시민혁명이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없었던 공론장이 구조변동을 겪을 일도 없었거니와 그걸 다시 회복시킬 일도 없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럼 뭘까 하는 생각에서 고민했던 것이 푸코의 담론이론이 남조선 사회에는 더 시급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남조선 사회는 일방적인 담론 유포와 확산에 혈안이 된 사회이고 주류 담론의 해체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으로 보였다.

지금 이렇게 쓴 글은 사실 한 세미나 시간에 교수님과 언쟁했던 내용이기도 했다. “교수님, 한국사회는 공론장 자체가 형성이 안 됐는데 하버마스가 유용할까요? 담론들이 공정하게 나눠질 수 있는 공론장 형성이 먼저 아닐까요? 저는 그래서 푸코의 이야기가 더 매력적입니다.” 대화를 재구성 해서 유하게 들리는 것 같지만, 저때는 사실 굉장히 시니컬 하고 거의 비웃음의 논조였다.

저 대화를 나눈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면서 생각의 변화가 생긴 것이 있다. 아, 이제, 하버마스의 공론장에 대한 이야기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되기는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일방적인 담론 생산이 먹혀 들지 않는 시대가 되었고, 저항이니 대항이니 하는 거창한 수사가 아니더라도, 상식적으로도 담론 자체를 평가할 수 있는 시민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기폭제가 된 것은 인터넷의 발달을 보면서 생각하게 되었다. 담론 유포가 일방적이었던 것은 통로가 일방적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는 통로가 다변화되면서 그 일방성이 무너졌다. 그리고 담론을 생산하는 주체가 그 이전까지 권력이라는 거대한 체제였다면 이제는 누구나 담론 생산의 주체로 나설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가짜뉴스라는 기이한 변형체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거기에 기생충처럼 서식하는 무주체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를 걸러낼 수 있는 힘들도 생겨났다. 그러니 이제 어떠한 하나의 담론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싶다. 담론들의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가 도래했다.

그래서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이나 의사소통이론을 다르게 해석해야 할 필요성이 더 절실해 보인다. 공론장이 없던 시대에 공론장이 구조변동 했다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제 시작된 공론장 시대에 어떻게 더욱 구체적이고 분명한 의사소통을 이룰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는 뜻이다. 근데 비판이론 전공했다고 진보인양 학자들이 저러고 나가자빠져 있으니 참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유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공론장(Öffentlichkeit) 개념과 이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 토의민주주의론은 현대민주주의 논의에 중요한 시사점올 던져준다. 하버마스는 공론장 개념에 대한 정치·사회철학적인 분석올 통해 대의민주주의 제도의 취약점올 보완해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참여의 가능성을 제시한 거장이다. 하버마스는 대화와 토론에 기초한 의견 빛 의지형성을 통한 시민들의 민주적 역량을 의사소통적 권력이란 개념으로 규정하고, 정치권력과 국가 및 사회의 규범적 질서가 어떠한 관계 속에 있는지를 체계적으로 규명해내고 있다.

하버마스는 근대적 입헌국가를 탄생시킨 근대부르주아 공론장의 역할과 그 구조변화를 역사적인 관점에서 고찰하고, 나아가 20세기를 풍미했던 자본의 집중과 국가개입의 확대, 대중사회의 등장, 관료제와 이익집단, 사당화된 정당, 거대 기업화된 대중전달매체 등이 시민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격리시킴으로써 공론장의 재봉건화를 초래하게 되었다고 진단했다. 하버마스는 현대 대중사회에서의 왜곡되고 소멸되었던 공론장을 다시금 부활시켜 참여를 통한 민주주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공개성에 입각한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과정에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이 논의를 다시 해야 할 때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