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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사심 없이 준다는 것(증여),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한 방법

지난 20세기 중반 이후 프랑스 학문계를 풍미했던 여러 사상들의 밑바닥에 는 ‘증여 해석’의 문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공통된 관심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가 『증여론』에서 개시한 증여의 복합적 형태에 관한 인류학적 연구 이래, 바타이유(George Bataille),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르포르(Claude Lefort), 데리다(Jacque Derrida)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이 이 문제와 씨름했다. 이들 각자는 증여 행위의 인류학적 근거와 궁극적인 모티프를 찾아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바타이유는 축적 지향의 경제관을 뿌리째 뒤흔들어 놓을 ‘파괴적인 소모’의 열정에서 증여의 본질을 보았다.

레비-스트로스는 증여의 모든 역사적 체험을 구조주의적 교환 모델 속에 가두어 버렸다.

르포르는 구조주의가 구조라는 감옥에 가두었던 증여의 경험을 ‘타인과의 근원적인 마주침’에 근거한 현상학적 체험 속으로 복원시켰다. 

데리다는 모든 증여 체험의 상황을 뒤엎는 ‘불가능한 선물’이라는 골치 아픈 문제를 제기하면서 증여의 가능성 자체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학자들의 주장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머리를 쪼개질 것 같은데, 일단 이렇게 단 한 문장씩으로 갈무리 할 수 있다.

이렇게 증여의 문제는 다양한 관점을 향해 순차적으로 소급되면서 근대의 지평을 넘어 탈근대의 차원까지 도달하는 주제로 확대되어 갔다. 증여에 대한 연구는 논리적 결과가 어떻든 간에 타자, 윤리 그리고 사회의 밑바탕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품고 있다. 지난 세기에 이루어진 증여에 대한 탐색은 바로 이 세 가지 차원에 대한 그 이전 지식의 위기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증여 문제의 여파는 사회학의 내부, 특히 주류 경제학의 관점에 의존했던 여러 사회학 이론들 안에서도 일어났다. 타인에게 무언가를 주거나 베푸는 행위의 궁극적인 동기는 무엇인가?

경제학적 사고는 확실히 하나의 대답만을 가지고 있다. 증여의 동기는 ‘자기 이해’의 충족에 있다. 무언가를 주는 이유는 외적 효용(되돌아올 답례 선물의 예측) 혹은 내적 효용(주면서 느끼는 자기 만족감)에 근거한다.

그러나 ‘자기이해’의 충족만을 증여의 수수께끼를 종결짓는 유일한 동기로 간주할 수는 없다. 증여는 경제학적인 지각과 판단의 바깥에서 그것을 거스를 때 일어난다. 주는 자와 받는 자는(파는 자와 사는 자와는 달리) 자신들을 경제적 파트너로서 인지하지 않을 때 비로소 증여 행위의 당사자가 된다. 그들 모두는 경제적 의식의 일정한 공백 속에서 증여의 주체로서 스스로를 의식한다.

이러한 증여의 문제는 사회학과 경제학의 불화를 조장한다. 경제학이 주장하는 기준들을 따르는 사회학이 가지는 취약점을 여과없이 드러내기 때문이다. 결국 사회학이 갈림길을 만나게 된다는 말이다.

경제학의 공준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그 공준을 버리고 사회학의 독자적인 길을 걸어갈 것인지에 대한 결단을 촉구한다는 뜻이다. 뭔 뜻인지도 읽었던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둘러싼 이렇게 험난 하고 심각한 지형지물이 있는지 몰랐다. 

어쩌면 자본주의에 균열을 초래하는 행위의 한 종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고 실제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