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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진리의 출현, 포함과 배제를 넘어서는 그 무엇이 탄생하는 것

“나의 취미는 성, 종교, 수학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오로지 수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자 하는 소망만이 나를 자살하지 못하게 했다.” 이런 야리꾸리한 이야기를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당하게 밝힌 사람은 다름 아닌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 그리고 평화주의자였던 버트런드 러셀 경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경력에 대해 남들이 읽어도 겁나게 기분 나쁜 말을 했다.

“머리가 가장 좋았을 때는 수학자을 했고, 머리가 나빠지자 철학자가 되었습니다. 철학도 할 수 없을만큼 머리가 나빠졌을 때는 평화운동을 했지요.”

아~ 진짜 옆에 있었으면 가지고 있는 목발로 한 대 후려쳤으면 싶은 인간이다. 근데 어쩌랴, 러셀 옹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그의 업적과 저술은 산을 이루었는데 말이다. 뎅장. ㅋㅋㅋ

하지만 그가 자신의 인생 여정에 있어 평화운동을 나이 든 노인이 할 일 없어 하는 것처럼 자조섞어 이야기했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단순하지만 누를 길 없이 강렬한 세 가지 열정이 내 인생을 지배해왔으니,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욕, 인류의 고통에 대한 참기 힘든 연민이 바로 그것이다.”

어쩌면 러셀 옹은 진정한 박애주의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이렇게 주절주절 러셀 옹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떤 책을 읽다가, 정확히는 프랑스 철학자가 알랭 바디우할배의 책을 읽다가 저 러셀 옹의 집합론을 이해하지 않으면 바디우 할배의 이야기를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러셀 옹의 이야기를 더듬어 쓴 것이다.

어쨌든 러셀 옹의 이론 중에 “버트런드 러셀의 역설”(Russell’s Paradox)이란 것이 있다. 수학에서 쓰이는 집합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속하는 이러저러한 원소들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집합은 원소들을 무작위로 뽑아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질서 또는 조건들에 따라 만들어진 구조를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 집합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그것에 속하는 것만을 그 집합의 원소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에 집합이라는 것은 그 자체 내에 포함과 배제라는 작동원리가 숨어 있다. 예를 들면, 키가 180cm인 남자들의 집합이라고 하면, 이 키보다 크거나 작으면 모두 집합에 들어가지 못하거나 밀려나는 것이다.

러셀 옹의 역설이란 집합의 원소에 대한 기준을 정할 때, 가령 “산”이라는 집합을 만든다고 하면, 여기의 원소로는 금강산, 천마산(내가 자란 동네 산 이름이다, ㅋㅋㅋ), 히말라야 산, 록키 산 등등이 포함된다. “차”라는 집합을 만들어도 동일하다. 티코, 아토즈, 폭스바겐, 등등.

그런데 문제는 산 혹은 차라는 집합을 만들 때, 혹은 시험에 산 혹은 차의 원소들을 쓰라는 문제가 나왔다고 치면, 거기에 산 혹은 차 이렇게 썼다가는 시험지나 답안지에 사선 그이는 것은 물론이고 성깔 안 좋은 선생님 만났다가는 귓방맹이 맞기 딱 십상이다(실제로 나 때는 그렇게 맞는게 일상이었다. 뎅장. ㅋㅋㅋ).

즉,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은 집합이 된다. 산과 차라는 집합 안에 세상 모든 산과 차의 이름을 다 넣을 수는 있지만, 산과 차 그 자체는 원소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이러한 집합들은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지 않는 집합을 만들려고 하면 모순에 맞닿뜨리게 된다. 즉 ‘메타-집합’이라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는 말이다. 바디우의 출발점은 바로 이 메타-집합의 모순에서 출발하는 것 같다.



바디우는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신의 이름을 포함하는 집합이 있고 그러한 집합이 생겨날 때, 집합론의 필연성 또는 존재의 법칙을 허물고 새로운 필연성의 기초를 세우는 사건이 일어난다고 한다. 이 부분까지가 내가 이해한 바디우 할배 이론의 기초작업인듯 싶다. 이건 그야말로 바디우 할배에게 있어 기초이고 여기에 더 많은 것들을 쌓아 올리는데 아직 내게는 버거운 이야기들이다.

어쨌든 바디우 할배도 포함과 배제라는 이중의 장치가 작동하는 원리를 급격하게 허물어뜨리고 이것을 넘어서 다른 것이 출현하는 것을 진리의 출현으로 보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