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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제암스 조이스, Deficio, ergo sum / 실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제임스 조이스(James Joyce)에 대한 간결한 입문서를 하나 읽고 있는데 한 구절이 눈에 들어온다. 동생 중 하나의 증언에 따른 이야기였다.


26살 때까지 제임스 조이스는 “파리에서는 시인으로, 더블린에서는 저널리스트로, 트리에스테(이탈리아의 한 항구)에서는 연인과 소설가로, 로마에서는 은행직원으로 그리고 또 다시 트리에스테에서 아일랜드 독립당원과 교사와 대학 교수로서도” 모두 실패한 인생이었다.


“a poet in Paris, as a journalist in Dublin, as a lover and novelist in Trieste, as a bank clerk in Rome, and again in Trieste as a Sinn Feiner, teacher, and University Professor.”

- Eric Bulson, 『The Cambridge Introduction to James Joyce』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17. Quoted in John McCourt, 『The Years of Bloom: James Joyce』 (Dublin: The Lilliput Press, 2000), 131–32.


참 많은 직업을 전전한 것 같고, 실패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렇다할 성과가 없었다는 말로 이해하자면, 제임스 조이스의 인생이 끝모를 바닥으로 추락하지는 않았지만 정말 너덜너덜했던 것 같기는 하다. 20세기 초와 지금을 일대일로 비교한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에, 그 당시 저 나이면 지금으로 따지자면 40세 정도가 될 것 같은데, 그 나이에 저러고 있었으면 모든 걸 포기할만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신기하다. 저런 힘든 시기를 겪었던 것이 조이스의 정신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하고 궁금해진다.


그런 시기를 지나 온 조이스의 문학은 20세기 최고의 문학으로 자리매김을 했다. 특히나 그가 보여준 문학기법은 괴이 혹은, 요즘 잘 쓰는 말로, 괴랄하기까지 하다. 현실 세계인지 상상적 정신의 흐름인지가 구분되지 않는 정말 이해하기 힘든 문학작품들인데, 카프카 이후로 이런 작가는 처음이지 싶다.


나이가 조금 덜 들었을 때 멋 모르고 읽다가 집어던졌던 책들을 그리스 문학에 푹 빠져살다가,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들고 보니 여전히 괴이하지만 그래도 예전만큼 힘들지는 않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다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고...


어쨌든 예전에 대하지 못했던 그의 시들을 읽고 있으면, 이게 같은 저자의 작품인가 싶을 정도로 서정적이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기에 희대의 작품들을 창착했는지도 모르겠다. 그의 시들 가운데 마치 니체를 떠올리도록 하는 시가 한 편 있다.


「Ecce Puer」


Of the dark past

A child is born

With joy and grief

My heart is torn


Calm in his cradle

The living lies.

May love and mercy

Unclose his eyes!


Young life is breathed

On the glass;

The world that was not

Comes to pass.


A child is sleeping:

An old man gone.

O, father forsaken,

Forgive your son!

- James Joyce, 『Collected Poems』 (New York: The Viking Press, 1957), 63.


「저 아이를 보라」


어두운 과거에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기쁨과 슬픔으로

내 마음은 찢어집니다.


고요히 요람 속에

생명이 누워 있습니다.

사랑과 자비가

아이의 눈을 뜨게 하소서!


어린 생명이 숨을 쉽니다.

유리 위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한 아이가 자고 있습니다:

늙은이는 가고,

오, 버람받은 아버지,

당신의 아들을 용서하소서!


왜 이 시가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읽고 있으니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이 겹쳐져 또 눈이 시럽다. 요즘은 생명이라는 단어만 읽어도 울컥울컥 한다. 이런걸 트라우마라고 하지 싶다.


어쨌든 그렇게 실패하는 삶의 여정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어낸 조이스가 새삼스레 다가온다. 흘려들은 조이스의 승질머리를 떠올리면, 데카르트(Descartes)의 명제를 살짝 비틀어, 실패하고 있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 아마 이렇게 읊조리지 않았을까 싶다.


“Deficio, ergo sum.”

“실패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실패하고 성과없는 인생을 살아갔던 모습에서는, 감히 조이스에게 비할 인생은 아니지만, 어차피 조이스나 나나 동일하지 않나 하는 위로를 나에게 던져 보는 밤이다. 그렇기에 그런 세월을 감내하며 살았기에, 그래서 필멸의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영예로운 사건인, 세대와 세대를 이어 끊임없이 회자되는 문학을 남기지 않았을까? 결국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낯섦으로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어떻게 감내하는가가 필멸의 인간에게 주어진 운명이 아닐까 싶다.


불멸의 문학작품은 고사하고 살아온 삶의 결말도 못 짓고 죽지나 않았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가져본다.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뎅장.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