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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크눌프,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중딩 1학년이나 2학년 때이지 싶다. 네 분의 누님 중에 몇 째 누님께서 읽으시고 방 한 쪽에 있던 책을 보았던 것이 말이다. 바로,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였다.

누님들이 책을 좋아하셨던 터라 자연스럽게 내 손에 쥐어지는 것들이 많았는데, 그 중의 한 권이었다. 중딩이 읽기에는 어려웠던 책은 아니었지 싶은데, 그 당시에는 너무 책이 안 읽혀서 도중에 그만 두었던 기억이 남아 있다. 그 이후로도 다시 읽을 생각도 하지 못했고.



그런데 성격이 지랄맞아서 그런 책들은 끝까지 기억하고 있는다. 무슨 마음의 빚이나 짐처럼 싸매고 돌아다닌다. 그러고는 기회가 찾아오든지 내가 기회가 만들든지 해서 기억코 읽는다.

사실 얼마 전에 『헤르만 헤세 시집』(송영택 옮김 [서울: 문예출판사, 2013])을 구입해 읽으면서, 그때 포기했던 『크눌프』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곤 또 작정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조카가 중학교를 졸업하기도 해서 책 좀 사준다고 같이 서점엘 갔다가 조카에게 책 두 권 사주고 결국 『크눌프』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마음의 빚이라도 청산한 기분이 들어서 웃기기도 하다.

그렇게 돌아와 이리저리 살펴보니 그때는 왜 이 책을 그렇게 읽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렇게 이해하지 못할 단어들이나 구절들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데 다시 읽으며 생각해 보니, 내 느낌이지만, 기승전결이 있는 것도 아닌 정말 심심한 책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 기간 내내 크눌프는 목적도 없이 계속해서 고행 주변을 돌아다녔다. 그 동안 그는 두 번이나 숲속에 숨어 아주 가까이에서 석공 샤이블레를 바라보며 관찰했다. 하지만 또다시 그를 부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생각해야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그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내내 그는 어긋나고 뒤엉켜버린 자신의 삶 속에 깊이깊이 빠져 들어갔다. 그것은 마치 질긴 가시덤불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 같았는데, 그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나 위로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병마가 그를 다시 덮쳤다. 어느 날인가는 하마터면 다 그만두고 게르버자우를 다시 찾아가 병원 문을 두드릴 뻔했다. 그러나 하루 종일 홀로 지낸 후 다시 저 아래 시내를 바라보았을 때 그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적대적인 것처럼 느껴졌고, 이제 그는 결코 그곳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때때로 그는 마을에서 빵 한 덩어리를 샀다. 개암나무 열매 또한 충분히 남아 있었다. 그는 삼림 노동자들의 작은 통나무집이나 들녘의 짚단 사이에서 밤을 보냈다.

이제 그는 눈보라가 거세게 몰아치는 가운데 볼프스베르크를 지나 골짜기의 물레방앗간을 향해 가고 있었다. 지치고 쇠약해졌는데도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자기 삶의 마지막 부분까지도 더 힘 있게 사용하여 모든 숲 가장자리의 숲속의 길들을 따라 걷고 또 걸어야만 한다는 듯이. 병들고 지쳤는데도 그의 두 눈과 코는 예전의 민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런 목표가 없었는데도 그는 마치 예민한 사냥개처럼 사방을 쳐다보고 냄새 맡으며, 땅의 모든 침강, 모든 바람결, 모든 짐승의 흔적 등을 확인하면서 다녔다. 그의 의지는 그곳에 없었으며, 그의 다리는 저절로 걸어가고 있었다.”

- 헤르만 헤세, 『크눌프』, 이노은 옮김 (서울: 민음사, 1997), 128-129.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용인데, 막상 읽어보면 그리 만만한 책이 아님을 알겠다. 방황 혹은 여행하는 크눌프, 책에 의하면, 죽어라 하고 돌아다닌다. “길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 말이다.

그런데 이게 인간의 삶이지 싶다. 인간의 삶을 흔히들 여정 혹은 여행에 비유하곤 하는데, 그 여정이나 여행의 목적지 어딘지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들을 알고 걷는 사람이 도대체 몇 명이나 있을까? 딱부러진 목적지는 하나 있다, 그것은 삶의 마지막 역이 죽음이다.



하지만 삶의 목적지를 죽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도대체 몇 명이나 될까? 다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사는데 말이다. 그렇기에 모으고 또 모으고 필요도 없는데 모으고 살지 않아?

어쨌든 다시 읽으며 삶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갈고도 힘겹고 의미 없는 여행”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