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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김명수, 그 십자가에는 예수가 아니라, 발가벗겨진 창녀가 매달려 있었다


아마 이 이야기를 대학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 스승님으로부터 들었던 것 같다. 뭐라고 할 말을 잃어버렸었다. 그리고는 스승님의 신학하시는 내용을 조금이나 이해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한 가지 또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야기는, 대학 2학년 때 스승님께서 강의 시간이 되어 강의실에 들어오시자마자, “제3의 길이 어딨어? 그거 다 거짓말이야.” 하시는게 아닌가? 갑자기 무슨 말씀이시지 했는데, 강의를 마치고, 혼자 곰곰히 생각해 보니 그 당시 영국 총리의 후견 학자를 자처했던 ‘안토니 기든스’의 <제3의 길>을 맹렬히 반대하셨던 것이다. 학문의 방향이 ‘민중신학’을 해 가시는 스승님이 보시기에 ‘제3의 길’은 존재할 수 없는 허구라는 것을 강변하셨던게다. 4년 내도록 스승님께 배운 것은 이런 신학의 내용들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스승님께서 방으로 조용히 부르시더니 책 목록이 빼곡히 적힌 종이를 한 장 주시며 “이 책들 한 번 꼭 읽어봐” 하셨다. 무슨 책들인가 하고 유심히 들여다보니 전부 사회과학 서적들이었다. 그때부터였을 것 같은데, 내 전공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 같은 철학이나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 길은 그때부터 잘못들어섰던 것이었다. 뎅장. ㅋㅋㅋ

어제 갑자기 컴퓨터 파일정리들을 한다고 폴더들을 하나 둘 열어보다가 스승님의 글을 발견했다. 다시 읽어도 뭐라 할 말이 없는 글이다. 며칠 전부터 민중신학에 대해 정리하는 글을 하나 쓸까 하다가 민중신학의 자리가 어디인가를 밝혀주고 있는 이 글 하나면 충분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렇게 열심히 자판을 두드렸다. 아래 글부터는 스승님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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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당시 필자는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이었는데, 박정희 유신 정권은 ‘장공 김재준 신학’을 연구하기 위하여 한신대 대학원에 유학온 재일동포 학생을 빌미로 소위 ‘학원간첩단 사건’을 날조하였다. 이미 같은 해 봄에 박정권은 한국신학대학의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배후에서 조종한다는 이유로 안병무와 문동환 교수를 해직시켰고, 한신대학에 무기한 휴업령을 내린 터였다.

당신 군사정권은 학원간첩단 사건을 날조함으로써 한신대와 다른 대학의 학생운동 배후에는 북괴의 고정간첩이 있다는 점을 대외 홍보용으로 이용하고, 이를 계기로 민주화 학생운동을 원천봉쇄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당시 중앙정보부는 한국에 유학온 재일동포 학생들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 사건이 영화로 만들어져 당시 군부대, 예비군 훈련장, 학교 교련시간, 교도소 등지에서 상영되었다는 사실을 필자는 출소 후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하여튼 필자는 한신대 학생운동의 배후 조종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1심 재판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2심 재판에서 10년형이 확정되었으며, 서울, 대전, 대구 교도소 등을 전전하면서 수형생활을 하다가 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암살사건을 계기로 4년 6개월 만에 출소하게 되었다.

감옥에서 겪었던 여러 경험은 필자의 삶과 신학의 방향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편이다.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의 밑바닥 인생들, 특히 소매치기, 강도, 폭력배, 사기꾼, 좌익수, 사형수 등과의 만남은 필자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특히 군사정권은 조국이라고 찾아온 재일동포 학생들에게 간첩누명을 씌워 온갖 고문을 다한 끝에, 무기형을 때려 0.78평 짜리 독방에 가두어놓고, 인간 이하의 온갖 고문과 학대를 가하였는데, 대전교도소에서 만난 재일동포 학생들, 특히 대구 교도소에서 2년 동안 필자의 옆방에서 함께 수형생활을 해온 재일동포 서승 씨(그는 중앙정보부의 고문과정에서 화상으로 인하여 얼굴의 형체가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는 필자의 마음속에서 따스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테지만, 필자가 감옥에서 만난 바닥사람들 대부분은 건강한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개인이 아니라 사회에 더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더욱 굳히게 되었다.

76년 겨울 서대문 구치소에 있을 때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차디찬 마루방에 짚으로 엮은 가마니를 깔고 아침에 일어나 물통에 있는 얼음을 깨고 세수하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손발뿐 아니라 귀에까지 얼음이 배겨 고생하기도 하였던 혹한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12월에 들어서자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하여 형이 확정된 사형수를 모두 사형집행한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돌아다니며 형무소의 분위기를 음산하게 하였다.

필자의 옆방에 이모라는 사형수가 있었다. 같은 고향사람이고 사람이 온순하게 보여서 필자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교도관의 눈을 피해가며 틈틈히 통방(通房: 교도관의 눈을 피해가며 옆방에 있는 재소자들과 말이나 기호로 의사를 전달하는 행위)을 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고아원을 떠돌아다니며 살았다고 한다. 머리가 커지자 고아원을 뛰쳐나와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을 무대로 구두닦이를 했고, 어쩌다 보니 소매치기가 직업 아닌 직업이 되었단다. 그후로 그는 교도소를 자기 집 안방 드나들 듯했다.

지난번 출소했을 때 그는 소매치기 생활을 청산하기로 결심하고, 장사밑천이라도 마련할까 하여 천안 근교에 있는 어느 목장에 들어가 2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는 장사하기로 결심하고 그동안 밀린 임금을 요구하였으나, 주인은 앞으로 1년 동안 더 일을 해야 주겠다며, 만일 지금 나간다면 그동안 체불된 임금도 주지 못한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날 저녁 그 이웃은 읍내로 내려가 술을 인사불성이 될 정도 마시고, 저런 노랭이 수전노는 내 손으로 죽여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끼로 그를 살해하였다.

사형집행 전날 운동시간에 필자는 사형장 옆에 있는, 눈덮인 조그만 공터에서 그를 만났다. 마치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그가 필자에게 다가왔다. “김형, 사람에게는 예감이라는 게 있나보죠? 나는 내일 저 하얀집(사형장을 가리킴)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제대로 숨 한 번 크게 쉬어보지 못하고 가게 되는군요. 김 형, 부디 나 같은 인간들을, 사회에서 냉대받고 음지에서 꿈틀거리다가 소리없이 죽아가는 한맺힌 인간들을 기억해주시오.” 운동시간이 끝나고 감방으로 돌아가오는 길에 그는 내 손에 무엇인가 꼬옥 쥐어주었다. 칫솔대로 만든 십자가였다. 내 이웃이 교도관의 눈을 피해가며 유리조각으로 틈틈히 조각하여 만든 것이었는데, 그 십자가에는 예수가 아니라, 발가벗겨진 창녀가 매달려 있었다.

다음날 새벽, 구슬픈 기상나팔 소리와 함께 그 이웃은 무술교도관들에 의해서 끌려나갔다. 몇 분이 지났을까, 그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어 하얀집에서 흰 보자기에 싸인 채 간병(看炳)들에 의해서 손침대에 실려 나갔다.

그날, 그리고 그 다음날, 돈 몇푼을 벌기 위하여 17명의 목숨을 앗아간 김모 씨, 어떤 사유인지는 모르지만 자기 애인을 죽여 김치 담갔던 이모 씨, 그리고 사상수 2명을 포함하여 15명의 사형수가 형장에서 운명을 달리하였다.

나는 일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저들의 비참한 운명을 둘러싼 많은 상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들 운명의 책임은 전적으로 저들 개인에게만 있는 것일까? 이 사회 구성원의 하나인 내게도 저들의 운명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닌가? 사회가 인간의 사회요, 바로 인간들에 의해서 구성된 것일진대, 사회적 모순은 바로 인간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고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종교인의 한 사람으로서 새삼스럽게 사회의 중심부에서 밀려난 변두리 인간들의 비참한 운명과 불의한 사회구조 사이에 어떠한 관계가 있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독교의 복음은 저들에게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이 하나의 화두(話頭)가 되어, 마치 살 속에 박힌 가시처럼, 지금도 여전히 나의 의식과 일상성에 매몰된 삶을 일깨워주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