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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고통해결이 불가능할 때 전체주의는 나타난다

고통해결이 불가능할 때 전체주의는 나타난다
후쿠시마 원전 재앙과 경제불황은 전체주의로의 회귀에 모든 조건이다
- 에큐메니안(http://www.ecumenian.com/) 칼럼 기고글

전체주의는 개인보다 사회·집단·국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민족이나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희생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사전적 의미로, 모든 활동은 오로지 전체, 즉 민족이나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이념 아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상 및 체제를 말한다. 독일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나치즘 체제를 전체주의의 전형이라고 규정했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선전과 조직을 통해 형성되고 피지배자에 대한 총체적 지배에 이르러 전체주의가 완성되며, 전체주의에서는 지도자 원칙이 강조되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법에 기초하여 권력이 행사되는 독재보다 더 비민주적인,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나타난 한 종류의 정치체제의 총칭이다.

전체주의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자유를 통제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지지와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다운 방식으로 정치적, 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 전체주의는 강한 유혹의 형태로 다시 나타날 것이다.”고 했다. 현재 일본은 아렌트의 지적과 같은 상황이다.

제국주의와 전체주의가 전세계를 휩쓸던 20세기 초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일본을 예의주시해야 할 것이다. 전체주의가 나타날 조짐을 현재 일본은 모두 안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자신의 자유를 희생당하면서도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이유는 자유의 억압에 대한 반대급부가 따르기 때문이다. 자유가 구속당하는 대신 얻는 첫 번째 보상은 소속감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 개인은 공동체를 통해 소속감과 더불어 보호받고 있다는 안전감을 얻는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A. H. Maslow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다섯 가지의 기본적인 욕구가 있다. 이는 생리적 욕구, 안전의 욕구,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자아존중감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이다. 이 가운데 안전에 대한 욕구는 안전, 안정, 보호, 질서, 불안과 공포로부터의 해방 등과 같은 욕구가 포함된다. 애정과 소속의 욕구는 특별한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어떤 집단에 소속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표현된다. 즉 단체나 클럽에 가입하여 소속감을 느끼기도 하고, 특정한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가짐으로써 애정의 욕구를 만족시키기도 한다.

두 번째 보상은 사회적 인정과 자의식의 고양이다. 모든 사람은 공동체 안에서 각자 맡은 활동역할을 통해 공동체 집단으로 연결되고 자신이 개인적으로 중요하다는 느낌을 체험한다. 매슬로의 표현을 빌자면, 공동체 안에서 개인은 자아존중감의 욕구를 충족시킨다. 자아존중감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은 열등감, 좌절감, 무력감, 자기 비하 등의 부정적인 자기지각을 갖게 된다. 자아존중감의 욕구는 기술을 습득하고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긍정적인 평가를 들음으로써 충족된다.

일반적으로 한 집단에 속한 개인은 그 집단의 다른 성원들과 같이 행동함으로써 집단성원으로 수용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며 집단에서 소외되는 것을 피한다. 집단의 의견에 따르지 않는 개인에 대한 집단의 반응은 압력을 가하고 이것이 실패하면 배척하고 따돌린다. 심한 경우에는 직접적인 제재를 가한다. 이처럼 자신들이 속한 공동체나 집단 외의 사람들을 배척하는 것은 전체주의의 특징이다.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대중 집회, 정치적 의례, 행군, 전당대회 같은 대규모 집단 활동과 다양한 소규모 집단을 중요시한다. 집단에 소속되면 개인은 의식이 확장되는 느낌, 거대한 연대감, 황홀감, 도덕적 예민함의 상실과 탈개인화를 경험하게 된다. 이로 인해 집단 내에서는 개인의 경계가 모호하게 느껴지는 융화감이 생겨, 더 이상 개인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사람들’만이 존재하게 되어 도덕적 단순화와 지적 평준화만이 남게 된다. 집단은 이지적인 사고를 교란하고 봉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속한 집단에서 개인은 자신은 정신적 사고 능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게 된다. 이런 현상은 집단의 규모가 클수록 더 강렬하며, 감정적으로 전염성이 더 강하고 압도적이다. 대집단에 속한 개인은 내적으로 완전히 흥분되어 아무런 사유도 하지 않고 도취감에 빠져 판단력이 약해질 가능성이 많다.

이렇게 전체주의가 선서하는 달콤한 꿀물은 “전체주의의 승리는 곧 인간성의 파괴와 일치할 수 있다. 전체주의는 지배하는 곳마다 인간의 본질을 파괴하기 시작한다”와 직결된다. 일본이 현재의 고통을 감추고 국민들의 눈과 귀를 멀게 하기 위해 다시 전체주의로 회귀한다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우리의 저 밑바닥 속에 남아 있는 고통이 재현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일본 국민들이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는 아렌트의 말을 기억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