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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meneutics

정호승 - 서울의 예수 본문

그늘에 앉은 책들

정호승 - 서울의 예수

Wortstreit 2013. 6. 26. 02:20

시인 정호승은 1970, 80년대 대학가 주변을 중심으로 널리 사랑받는 이 땅의 대표적인 신진 시인의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 시기 그의 시는 우리 사회 내부의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현실의 비극에 대한 비판적 감성에 기반을 두고, 이로부터 추출된 민중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정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그의 시적 특성은 산문적인 표현 방식의 확대를 통해 현실 비판적 인식을 강조하고자 했던 대다수 당대 참여 시인들의 경우와 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즉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서정시 본연의 요건과 태도들을 포기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래서 초기에 발표된 그의 시들이 대중의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얻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이 조화롭고 균형 잡힌 작시법상의 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의 시를 읽으면 따뜻하기도 하지만 늘 아프기도 하다.


서울의 예수

1

예수가 낚시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 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등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 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 정호승, 『서울의 예수』(서울: 민음사, 1995), 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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