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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자유학생연맹 지도자를 역임했으며 후에 반전 공산주의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다가 2차 대전 중 나찌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알렉산더 슈밥(Alexander Schwab)은 “Beruf und Jugend”(직업과 청년)이라는 논문에서 직업생활은 학문정신에 부응하지 않는다면서 직업생활을 찬성하지 않았다. 이 논문을 계기로 바이에른 자유학생연맹은 학문, 교육, 예술 및 정치, 이 네 개 ‘직업 분야’에 종사하는 것을 두고 과연 현실 도피도 아니고 현실 영합도 아닌 ‘정신적 직업’이 오늘날에도 가능한가를 타진하기 위해 베버를 비롯한 ‘전문가’들을 초청해 연속강연을 주최하기에 이른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이 연속강연의 하나이며 독일을 비롯한 세계의 정치·사회적 격동기에 직업으로서의 정신노동이 어떤 역할과 기능을 담당할 것인가에 관한 베버의 답변이다.

베버에게 강연을 의뢰한 주최측은 아마도 학문추구를 직업으로 삼는 것이 어떻게 정치·사회적 현실과 연관될 수 있는가에 관한 전문적인 해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베버의 강연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 관한 선명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날 학문은 더 이상 세계의 의미를 밝혀줄 수 없을 뿐 아니라 철저히 가치중립적이어야 하고 교수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강의실에서 표명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뜻 보아 베버의 강연은 삶의 의미를 밝혀 줄 수 없는 학문을 직업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라는 절망 어린 메시지를 전하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베버는 진정한 직업 정신의 쇄신을 통해 위기에 처한 참다운 앎의 가능성을 지극히 베버다운 방식으로 추구한다.

베버의 강연은 직업적으로 학문에 헌신할 것을 결심한 사람이 처하게 되는 외적 조건에서 시작하여 이러한 상황에서의 학문에 대한 내적인 소명의 문제로 넘어간다. 그에 따르면 독일 대학은 점점 미국 대학처럼 자본주의적이고 관료주의적인 경영체로 변모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학문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은 점차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되는 프롤레타리아와 유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 뿐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 학문의 지위와 역할은 보다 근본적인 변화를 맞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를 베버는 “주지화의 과정”(process of interllectualization) 혹은 “지적 합리화”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얼핏 들으면 “주지화의 과정”이란 지식의 증가를 뜻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 말은 인간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앎이 증가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감소했음을 뜻한다. 예컨대 원시인에 비해 우리는 노동 분업과 전문화로 인해 매일 식량을 얻기 위한 조건들에 대해 오히려 더 무지해졌다고 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존재, 자연, 신 혹은 행복에 이르는 길로 여겨졌던 학문에 대한 환상은 무너졌으며 학문은 인간 본성이나 자연으로부터 유리되었다. 학문 자체에 대한 믿음, “원하기만 하면” 언제라도 배워서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앎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으로 대체되었다. 

그 결과 인간은 계산과 예측의 범위를 벗어나는 삶의 국면들을 외면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지식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우리는 지적 “계산”의 영역 밖에 있는 “신비롭고 헤아릴 수 없는 힘들”을 삶으로부터 추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과정을 가리켜 베버는 “세계의 탈주술화”(the disenchantment of the world)라 칭한다. 

베버에 따르면 오늘날 세계는 이처럼 탈주술화되었을 뿐 아니라 다양한 가치질서들이 서로 화해하기 어려운 영원한 투쟁 속에 놓여있다. 서로 다른 가치들의 영원한 투쟁 속에 살고 있는 인간에게 보편타당한 가치나 의미란 부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를, 어떤 앎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느냐를 결정해야 한다. 이처럼 자연과학을 위시한 학문들이 인간사를 주관하는 신의 섭리와 진리, 진정한 행복과 인간의 본성을 밝혀 주는 것으로서 권위와 역할을 상실한 오늘날, 베버가 제기하는 문제는 단순히 “학문에 몸을 바치는 자에게 있어 직업으로서의 학문은 무엇을 뜻하는가”를 넘어 “인간의 생활 전체 속에서의 학문의 사명은 무엇이며 또 그것의 가치는 무엇인가”의 문제가 된다. 

베버에 따르면 학문이 실험실이나 통계실의 계산문제처럼 되어 버린 오늘날 학자는 학문 외적인 것들-가시적 업적이나 명예 등-과는 별개의 학문 그 자체만을 추구하는 전문화를 통해서만 학문의 내적 소명을 달성할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직업으로서의 학문의 가치는 학문 자체의 가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추구하는 개별 주체가 자신의 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강연 “Politics as a Vocation”(직업으로서의 정치)에서도 베버는 유사한 관점을 제시한다. 베버에 따르면 직업 정치가와 관료의 다른 점은 후자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일을 자신의 일로 받아들임으로써 결국은 다른 사람의 일에 봉사하는 데 그치는 반면 전자는 자신의 일을 자신의 일로 삼는 자, 자신의 일의 의미를 주체적으로 결정하는 자, 자신의 일을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일로 만드는 자이다. 마찬가지로 관료화, 자본주의화 하는 학문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주체적이고 정열적으로 그 일에 헌신하는 사람, “학문에 의해 생계를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학문을 위해” 사는 사람만이 학문으로서의 ‘직업’의 본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베버는 사적·공적 사명이자 소명으로서의 ‘직업’(Beruf) 본연의 뜻을 살려냄으로써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당면한 현실 상황에 대한 진단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미래의 방향을 찾을 방법을 모색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베버에게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추구한다는 것은 학문 외적인 조건과는 무관한 학문 자체만을 위한 헌신, 학문의 자율화, 혹은 전문화를 뜻한다. 그러나 이는 공적 사회 혹은 현실로부터의 학문의 소외나 도피가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의 정치적이자 도덕적 실천이 될 가능성을 연다.


“직업으로서의 학문”이 학자로서 못지않게 선생으로서의 교수의 자세를 중요한 문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 그러한 실천적 성격을 강력히 뒷받침한다. 베버는 강의실에서 선생이 가장 경계할 것은 정치적 선동이라고 지적한다. 선생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학생들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에 따르도록 선동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특정 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불편한”(inconvenient) 사실들을 인정하게끔 하는 것이다. 

이로써 베버는 정치적 관점이란 일부에게 편리한 사실들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 아니라, 지식인의 표면적 비정치 혹은 탈정치적 행위가 당파적 진실을 넘어 윤리적 실천으로 나아갈 가능성을 제시한다. 정치적 신념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현실 정치로부터의 후퇴나 무관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특정한 입장에서 보았을 때 “몹시 불편한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해지도록, 바꾸어 말하면 학생들로 하여금 다양한 가치들이 투쟁하는 현실을 바로 알고 자신이 택한 가치를 상대화할 줄 알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학자는 자신의 직업의 내적 소명 뿐 아니라 “도덕적 성취”를 달성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더욱 주목할 만한 사실은 베버가 이 같은 도덕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직업인의 예로 예술가를 꼽는다는 점이다. 베버는 다양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이 세상에서 이제 어느 한 개인이 자신의 주관적인 믿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도, ‘과학’에 근거하여 세상의 섭리를 설명하는 것도 어려워졌음을 거듭 지적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와 니체(Friedrich Nietsche), 그리고 보들레르(Charles-Pierre Baudelaire)의 『Fleurs du Mal』(악의 꽃) 덕분에 “어떤 것이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아름답지 않기 때문에 그리고 아름답지 않은 한 신성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름답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신성하지도 선하지도 않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것이 “참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고 베버는 말한다. 아름다움과 신성함 선함과 진리의 영역으로부터 배제된 것들, 다시 말해 익숙하고 편리하고 설명 가능한 영역에서 추방된 “신비롭고 헤아릴 수 없는 것들”을 다시금 삶의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것 이것이야말로 학자와 예술가가 직업인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베버는 ‘학문’과 ‘직업’ 모두가 일정한 위기와 한계에 처한 현실을 진단하는 것에서 시작해 학문을 직업으로 택하는 것의 의미와 가치는 개개인이 각자 “자신의 삶에 대해 갖고 있는 궁극적 태도”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학생을 대상으로 한 이 강연에서 베버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삶의 궁극적 무의미성 혹은 무책임한 주관주의나 상대주의의 옹호와는 거리가 멀다. 베버는 학생들에게 각자에게 의미 있는 앎을 선택하고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개인의 중요성을 강조함으로써 참다운 배움의 자세 역시 일깨운다. 그런데 이 때 참다운 배움의 자세란 선생의 일방적인 가르침을 잘 따라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 자신에게 있어서는 무엇이 신이고 무엇이 악마인지를 결정”하려는 태도, 다시 말해 개개인에게 유효한 앎을 판별하고자하는 자세를 뜻한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배움의 과정은 자율적·자발적 앎의 주체로서의 학생의 권리와 의무를 무시하고 “지도자” 역할을 자임하려는 선생의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기르는 것까지 포함한다. 실제로 베버는 이 강연문에서 강의실이란 발언권을 쥔 선생과 그렇지 않은 학생의 위계가 분명한 공간이기 때문에 선생은 더더욱 특정한 자신의 입장을 학생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는 동시에 학생들에게 학문의 수동적 수용자로 머무르지 말 것을 주문함으로써 스스로 정치적, 도덕적 실천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베버의 입장은 학자와 예술가의 “도덕적 성취”와 개개인의 신념 간의 절묘한 역학관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베버는 학문을 통해 각자 자신에게 유의미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선생과 학생의 참다운 앎에 대한 각자의 노력과 서로간의 협업이 동시에 필요하다는 것, 바꾸어 말해 영원히 배움을 중단하지 않는 학생다운 선생과 스스로 의미 있는 앎을 찾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선생다운 학생의 협업이 필수적임을 시사한다. 

이렇게 보았을 때 탈주술화 합리화 주지화하는 현실 속에서 베버가 말하는 학문의 가치자유(Wertfreiheit)란 불편하고 신비한 삶의 영역을 배제한 가치들을 진리와 객관이라는 이름으로 부여하는 역사적 흐름에 맞서 편협한 가치체계로부터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는 일로 탈바꿈한다. 베버에게 학문의 가치 자유, 자율화, 전문화는 학문으로부터의 가치 박탈이라는 피할 수 없는 암울한 역사의 결과물로 매몰되지 않고 그 거대한 흐름을 내부로부터 해체할 동력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그러한 동력을 베버는 직업으로서의 학문과 예술에서 찾는다. 베버의 강연은 이렇게 끝난다.

“합리화와 주지화, 그리고 무엇보다 세계의 탈주술화를 특징으로 하는 우리 시대의 운명은, 가장 숭고한 궁극적 가치들이 공적 삶에서 물러나 신비적 삶이라는 초월적 영역으로 혹은 개인들 간의 직접적이고 사적인 형제애 속으로 후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위대한 예술이 기념비적이기보다는 친밀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또한 오늘날 오직 가장 작은 그룹들, 개인들 사이에서만이 과거에 거대한 공동체들을 불길처럼 휩쓸며 한데 결합시켜주었던 예언적 정신(Pneuma)에 상응하는 어떤 것이 아주 약하게 맥박치고 있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닙니다. 만일 기념비적인 예술 성향을 강요하거나 ‘만들어’내려 한다면 지난 이 십여 년 간의 많은 그림들처럼 통탄할 만한 괴물들이 생산될 것입니다. … 그리고 학문적 예언은 광신적인 분파들을 만들어낼 뿐 결코 진정한 공동체를 창조해낼 수 없습니다. … 바라고 기다리기만 한다고 얻어지는 것은 없습니다. 우린 다르게 행동해야 합니다. 일에 착수하여 그 날의 요구 를 인간적이면서도 직업적으로 정당하게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각자 자신의 삶의 가닥들을 쥐고 있는 정령을 찾아 그에 복종한다면 그건 간단하고도 단순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