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늘에 앉은 책들

사람은 영향사를 벗어날 수 없는 존재다


어릴 때는 어떤 작품의 등장인물의 성격이나 대화 내용 이면에 깔려 있는 사회현실, 인류의 정신적 고뇌가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그런 것을 안다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어쨌든 그랬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 이런 저런 세상사 돌아가는 것도 알게 되고 머리에 쥐꼬리만한 지식도 쌓이게 되면 똑같은 책이 다르게 보이는 것이 다반사이다.

헤밍웨이의『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가 유럽에서 파시스트 세력과 세계 진보 세력의 일대 격돌의 장이었던 스페인 내전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것도, 톨스토이의『부활』이 러시아 전제군주에 대한 저항과 나아가서 종교나 법, 제도에 관한 근본적인 고민을 담고 있다는 것도, 헤세의『지와 사랑』이 인간의 오랜 숙제인 이성과 감성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저 두 여남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과 이별이 눈에 들어올 뿐이었다. 그러다가 울컥하는 장면에서 소도둑처럼 생긴거랑은 다르게 눈물도 찔끔 흘려보는 것이 다였다.

이건 부끄럽고 웃기는 고백이기도 하지만, 중딩 때인가 읽었던 마르케스의 『백년동안의 고독』은 정말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고 읽었다. 오로지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여남간의 성애 묘사에만 눈이 뚱그레져서 탐독했던 기억밖에 없다. 나중에서야 안 사실이지만, 이 소설의 배경이 되어준 마콘도는 실제로 있었다고는 하지만 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은 전설적인 존재라고 한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한 마을이 외국 자본 회사가 들어와 무자비하게 노동력을 착취하고, 그에 반항하는 노동자들을 전부 학살하면서도 정부 당국에서는 아무도 모르게 쉬쉬하는 것에서 제국주의적 자본주의 침탈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또 남미의 근친상간적 결혼 때문에 결국 자멸하는 모습도 어느 정도 담아내고 있다.

작가들이 그들의 상상력으로 써내려간 작품들이 현실과 무관한 것이 아니듯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방향은 철저하게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영향사’(Wirkungsgeschichte)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순수’라는 것은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다. 텍스트만을 죽어라 하고 파야하는 인문학에서조차도 그 텍스트를 해석하는 그 해석자도 영향사 아래 존재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늘에 앉은 책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르키 드 사드, <미덕의 불운>  (0) 2013.07.07
막스 베버, 직업으로서의 학문  (0) 2013.07.05
정호승 - 서울의 예수  (0) 2013.06.26
자화상(自畵像)  (0) 2012.05.26
정호승 - 외나무다리  (0) 2012.0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