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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화이: 다까끼 마사오, 박정희를 삼켜버린 아이

“괴물이 돼야 괴물이 사라지는거야”

영화 <화이>를 보고 나니 이건 뭐 프로이트에게 헌정해도 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 화이는 강도 및 살인청부 집단에게 납치되어 그들과 같이 길러진다. 이들이 화이를 납치한 이유는 그 뒤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있다고 간단하게 처리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이 영화의 가장 큰 뿌리가 되기에 또 구구절절 쓰고 싶지만 그냥 접어둔다. 

하여간 이 집단의 구성원은 5명인데, 화이가 이들 속에서 자라면서 이들 모두를 “아빠” 혹은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 5명의 소위 “아빠”라는 사람들의 성격은 다층적으로 그려지지 않고 하나씩의 단일한 성격으로 나타난다. 사람 혹은 남자들이 가질 수 있는 성격을 하나씩 가진 것으로 묘사되는데, 권위, 자상함, 냉혹함, 비열함, 모자람 혹은 성-애착(영화에서 유일하게 성적인 관심을 나타내고 즐기는 사람)이다.

재미있는 것은 화이가 유일하게 “아버지”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이 집단에서 가장 권위있는 사람을 그렇게 부른다. 나머지 4명에게는 “아빠”라고 부른다. 그리고 의지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자상함과 모자람 혹은 성-애착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아빠”이고 또 나머지 두 명은 친구처럼 지낸다.

신기한 것은 이 아빠들 중에서 가장 먼저 제거되는, 이 부분이 사실 애매한데 화이가 제거했는지 아니면 스스로 화이 손에 죽기를 자청했는지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보여지지 않지만, 어쨌든 “자상함”을 가진 아빠를 먼저 죽인다. 그리고 가장 최후에 제거되는 사람은, 자신에게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 준 이 집단의 한 여자의 남편이자 화이가 유일하게 “아버지”고 부르는, 바로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비열함”, “냉혹함”, “모자람 혹은 성-애착”에 이어서였다.

영화를 어떻게 이렇게 잘 짜맞추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 작가의 능력인지 감독의 능력인지는 모르겠지만 프로이트 신봉자인가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이 사람들 만나서 만나 물어보면 분명히 아니라고들 하겠지만 하여간 내 판단은 그랬다.



이 영화가 프로이트에게 헌정되어도 될만하다고 말했으니 프로이트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 해보자. 중고딩 시절은 물론이거니와 대학 1학년 1학기까지도 난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d Freud)가 누군지도 몰랐다. 잘 알지도 모르면서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이라는 말 자체에 대한 불신감이 많아서 뭐라고 해도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아서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2학기 때 프랑스 현대 철학자들에 관한 책들을 읽어가다가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언급하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프로이트였다. 그러니 역으로 다시 프로이트를 읽는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졌었다. 그렇다고 프로이트 책들을 읽는다고 제대로 뭘 모르니 프로이트에 대한 개론서들을 읽으며 알아갔다.

그렇게 읽으며 알게 된 사실은 프로이트가 정신분석학자로의 길을 나서며 학계와 학자들에게 가장 충격을 주었던 이론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Oedipuskomplex)였는데, 어린 아이들, 특히 남자 아이들이 성애를 느낀다는 이론이었다. 프로이트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극복하고서야 비로소 성인의 정상적인 성애로 발전해나간다고 말하면서, 일반적으로 신경증 환자는 이를 극복하는데 실패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이 컴플렉스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생물학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29년, 말리노프스키(Bronislaw Kasper Malinowski)가 이 컴플렉스는 그리스도교의 도덕에 의해 지지되고, 부르주아 경제 조건에 의해 강화된 아리안족의 가부장적 가족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에 따라 더 이상 보편적인 것도, 생리학적인 것도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면서 설득력 자체를 잃어버렸다.

또한 최근에 프로이트 후계자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사회적 원인과 가족 내의 대인관계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부친의 권위가 강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이러한 컴플렉스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내 방점은 말리노프스키나 프롬에 있다.

처음 프로이트의 글들을 읽으면서 아이가 성애를 느낀다는 것 자체에는 별 다른 이견이 없었는데, 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보편적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도통 찬성이 안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말리노프스키와 프롬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제서야 프로이트를 조금 달리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었다. 하지만 여유가 생긴 것이지 프로이트가 틀렸다거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하여간 아버지를 정신 혹은 심리적으로 제거해야만 되는 숙명으로 자라는 머슴아들. 이 머슴아들에게 사람이 된다는 것은 괴물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아버지로부터 독립할 수 있어야 아버지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런데 난 이 영화가 주는 의미를 다까지 마사오 소위 박정희의 제거로 읽었다. 한국 사회 근대화의 아버지였던 박정희가 제거되지 않으면 한국 사회는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메시지로 말이다. 그래서 처음에 기록한 화이의 가장 핵심적이라고 생각했던 대사를 이렇게 다시 쓰고 싶다.

“박정희라는 괴물을 제거해야 아버지가 되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