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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가장 사랑이 없는 종교, 한국 현대 그리스도교

바울 할배께서 일명 “사랑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더 이상의 언급이 무의미할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신 덕에, 그리고 예수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들을 줄줄이 이야기한 복음서들 때문에 그리스도교는 “사랑의 종교”라는 별칭이 붙여졌다. 그리스도교에 몸 담고 있는 신앙인이라면 사랑이 가장 첫째가는 덕목이 되어야 했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리 살아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계명이 된 것이다.

이것을 증명한다고 하면 조금 우습지만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일화가 하나 있다. 그리스도교가 태동하고 얼마 안 되어 초대 그리스도교의 한 이단자로 낙인 찍혔던 ‘마르시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마르시온은 지금의 터키 지역의 시노페라는 도시에 초대 그리스도교의 유명한 주교(Bishop)의 아들이기도 했고, 그 자신도 그 지역의 주교가 되기도 했다. 그랬던 이 사람이 아무리 구약성서를 읽어봐도 신약성서에 비해 온통 복수하고 죽이라는 말밖에 없다는 것을 나름대로 발견했다. 급기야 마르시온은 신약성서를 구약성서와 분리시키고 구약성서는 유대인의 역사서요, 율법일 뿐이라고 공표하기에 이르렀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앞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구약성서를 읽어보면 구약의 신(神)은 지고한 하느님이 아니라 무지와 분노와 복수의 마음을 지닌 열등한 창조 신으로 밖에 안 보이고, 신약의 하느님은 사랑으로 충만한 참 하느님으로 우주적 구원자인 그리스도를 보내신 분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논리를 끝까지 밀고 간 마르시온은 심지어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12제자들도 유대주의자들로 여겨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직 바울만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바르게 이해한 진정한 사도로 여겼다.

그리고 이게 웃기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가 그리스도교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이 있었는데,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담고 있다고 판단한 신약성서들만을 따로 모아, 마르시온은 정경(正經)으로 주장한 것 자체였다. 그가 정경이라고 주장한 성서는, 당연히 구약성서는 물론이었고 신약성서 중에서 유대교의 색체가 짙은 성서들도 모조리 제외시켜 버린 신약성서의 일부 책들이었다. 바울의 10개 서신과 누가복음서도 유대적 색채가 짙게 들어간 것을 뺀 편집본만이 정경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후대에는 ‘마르시온의 정경’(Marcionite Canon)이라고 불렀다. 초대 그리스도교는 이 사람 때문에 난리가 났고, 마르시온이 정경이라고 주장한 정경 목록 때문에 부랴부랴 공의회까지 개최하고 지금의 신약성서 27권을 정경으로 추인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일개 개인이 이런 주장을 하고 그쳤으면 이런 사태까지야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그리스도교는 오직 사랑의 종교이고 이것에 걸맞는 성서는 자신이 따로 정한 정경이라는 말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따랐으니 이런 난리가 났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지금에서야 이단이라고 낙인을 찍어버려 이단자라는 별칭 이외에는 더 이상의 언급이 불가능한 사람이지만, 그리스도교의 가장 첫 번째 가는 덕목이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마르시온만큼 그 계명에 철저했던 사람도 없을지 모른다.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를 보내신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한 성서만을 정경으로 보았으니 말이다. 막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에 죽고 사랑에 살았던 사람이 마르시온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구약성서를 너무 외피만 보았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참 구구절절 할 말도 많지만 그만두는게 상책이지 싶다. 어쨌든 마르시온은 그가 가졌던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라는 신념에 철저했던 한 사람의 신앙인이었다.

그래서 그랬을까, 11세기 경에 그려진 한 성화에는, 마르시온이 누가복음 이외에는 다 제외시켜 버렸던 복음서들 중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요한복음의 저자라고 알려져 있는, 그리스도께 가장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사도 요한과 시노페의 마르시온이 나란히 한 자리에 있다. 마르시온을 다시 평가하기 시작한 때가 어느 시점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이 성화를 그린 사람이 속된 말로 정통 그리스도교에 속한 사람이었는지도 잘 모를 일이지만, 마르시온을 다시 생각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그 생각에 가장 철저했던 사람으로 마르시온을 다시 생각했던 것 말이다.

그리스도교를 사랑의 종교로 떠드는 것도 그리스도교이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인정하고 있는데도 뭐가 그렇게 아쉬운지 다른 사람들은 목소리를 내지도 못하도록 목청 터져라 외치고 산다. 왜 그럴까? 

어쩌면 가장 사랑이 없는 종교라서 그러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목숨 걸고 실천해야 할 사랑을 실천하고 있지 못하니 그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는 것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연일 신문지상에서는 큰 목사늼께서 교회재정 수천억을 횡령했니 어쩌니 저쩌니 교회 장로들이 고소를 했니 어쩌니 저쩌니 하고 떠들어대고 있다. 이게 무슨 꼬라지인지 모르겠다. 하기야 자기 자신을 그토록 사랑했다는 반증 이외에 더 무엇이랴! 그러고 보니 사랑을 실천하기는 했다!

그래, 차라리 사랑에 목숨 걸고 이단자로 낙인 찍혀 사는 것이 자랑스러운 시대인지도 모르겠다. 교회가 자신들 이외에는 사랑할 줄 모르는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사랑하셨던 가난한 자들과 권력에 의해 폭행당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이단자로 사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단자로 낙인 찍힌다면 천국에서 더 큰 상급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