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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우리 사회의 집단적 발작과 푸코의 근대성

푸코 횽아께서 워낙 이상하고 신기한 연구들을 많이 하셨던터라 그에 대한 해석이 참 다양하다. 1960년대에는 그를 구조주의와 연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자신의 평가에 대해 초기의 푸코 횽아는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구조주의자들의 접근 방식과 자신의 방식과의 차이를 강조했다. 자신의 작업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설명이 붙는 것도 환영하지 않았다. 어느 대담 프로에 등장해서는 짜증까지 냈다고 한다. 승질하시고는 ㅋㅋㅋ

다만 푸코 횽아가 자신은 어떻게 ‘근대성’(Modernité)이 정의되는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서구에서 근대성이란 16세기 말 이래 서서히 형성되어 발달한 삶과 사유의 형태를 뜻한다. 그렇다면 왜 푸코 횽아가 그렇게 근대성을 문제 삼았을까?

사실 푸코 횽아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유명한 호르크하이머로 대표되는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주적도 바로 이 근대성의 규명에 있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현대 사회를 고도의 합리성(기술문명)과 고도의 반합리성(폭력, 광기 등)이 기묘하게 결합된 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유물론이자 경제 중심주의인 맑시즘과는 달리 '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셨다. 맑스 할배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부 구조’에 관심이 많으셨던 행님들이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평생 맑스 할배를 못 씹어 먹어 안 달이었던 베버 할배의 작업과도 통한다. 

특히 하버마스 행님의 그 유명한 박사학위 논문인 『의사소통행위이론』은 이 베버 할배와 맞대결하고 있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 우스갯소리로 하버마스 행님이 베버 할배를 잘못 해석했다면 이 논문은 그야말로 쓰레기통으로 가야 할 운명이다. 어느 논문을 보니 하버마스 행님이 베버 할배를 잘못 해석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기도 했다. 나야 베버 할배도 하버마스 행님도 잘 모르니 그저 그런가 보다 싶고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된다. ㅋㅋㅋ

어쨌든 푸코 횽아는 그의 스승이었던 조르주 깡길렘 할배의 영향을 받았고 그의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깡길렘의 학위 논문이 『정상과 비정상』이었는데 푸코 횽아도 이 문제를 혼식의 힘을 다해 파헤쳐갔다. 속된 말로 정상적인 인간과 비정상적인 인간을 구분하는 기준이 당최 뭐냐가 깡길렘이나 푸코 횽아의 연구과제였다는 말이다.

그러니 푸코 횽아의 방법론을 구조주의라고 했어도 초창기 푸코 횽아는 그리 거부하지 않았던게다. 그런데 푸코 횽아가 여기서 한 발 더 나가기 시작했다. 그만의 독특한 작업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구조주의가, 쉽게 예를 들면,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구조를 눈에 딱 보이는 법칙으로 보여주고자 했다면 푸코 횽아는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이 구조라는 것이 얼마나 허상이고 인위적인가를 보여주고 했다는 말이다. 특히 그 구조를 만들어지게 된 역사를 줄기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작업을 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푸코 횽아에게는 근대성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저 구조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찾다보니 그리 되었다는 말이다. 또 그러다보니 정치니 권력이니, 그 정치와 권력이 유포시키는 담론이니, 담론에 의해 형성된 주체니 하는 개념들이 굴비 엮듯이 줄줄이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이 작업들이 푸코 횽아의 모든 책들을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이라고 한다. 오늘도 이리저리 돌아댕기면서, 특히 저 구조를 만들내는데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것으로 푸코 횽아가 파악한 에피스테메(epistēmē)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우리 사회의 집단적 발작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푸코 횽아는 광기를 나쁘게 보지 않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광기는 정말 극도로 위험하다. 여기 저기서 광기의 전단계인 발광을 보고 있다. 어쩌면 이미 이 단계를 넘어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지랄 발광하는 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