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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한국 무대에 올려진 아서 밀러의 『시련』, 관객들에게 시련을 주다


Arthur Miller(1915-2005), 미국 최고의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인정되었던 사람이다. 전미비평가상에 풀러쳐상까지 받은 미국의 양심으로까지 불렸던 작가였다. 또한 영국이 낳은 불세출의 연기의 달인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장인 어른이다. 

하여간 아서 밀러의 여러 작품들 중에서 내가 읽은 것은 『세일즈맨의 죽음』과 『시련』이었다. 겨우 두 작품 읽고 뭐라 말한다는 것이 우습지만 저 두 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세일즈맨의 죽음』이었다. 처음 읽었을 때 내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내용으로 다가왔었다.

『세일즈맨의 죽음』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한평생 집세 내느라 죽도록 일했는데, 결국 내 집이 되면 그 집에 살 사람이 없어... 이 세상에 무슨 일이건 이루어 놓는 사람, 나도 그런 인간이 되고 싶었는데...”

꽤 어린 나이에 우연찮게 읽었는데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 있는건 아마 나를 둘러싼 환경과 적잖이 겹쳐지는 부분이 있어서였을게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얻은 감동 덕에 다시 집어들었던 책이, 바로 『시련』이었다. 첫 책이 너무 충격적이고 감동적이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시련』이라는 작품은 내게 그리 많은 것을 안겨준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이 작품도 그리 나이가 들기 전에 읽었던터라 배경이 되었던 1940-50년 당시의 메카시가 몰고 온 미국의 현대판 마녀 사냥이 무엇인지 전혀 몰랐었고 그러다 보니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던 것 같다. 

나중에서야 그 당시 배경되었던 미국 사회와 세계적인 냉전 상황도 알게 되어 『시련』이라는 작품이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밀러는 냉전 체제로 인해 몰아닥쳤던 매카시 열풍을 목격하며 노르웨이의 극작가 Henrik Johan Ibsen(헨리크 요한 입센)의 작품이었던 『민중의 적』을 각색하고자 했다고 한다. 한 책에서 밀러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중심적 주제... 인간 집단이 진리를 위험한 악마의 거짓말이라고 선고할 때 진리라는 민주주의의 꿈이 죄의 원천이 되어야만 하는지 어떤지의 문제였다.”

“극우파의 정치적, 객관적, 빈틈없는 운동은 새로운 공포뿐만 아니라, 새로운 주관적 실재, 신비로운 분위기를 창조할 수 있어서 점차 성스러운 공감대를 얻어 가고 있었다....그런 분위기 속에서 새로운 광신이 있었다... 새로운 죄가 매 달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죄가 태초부터 있었던 것처럼 참으로 신속하게 수용되고 있었다니 아주 신기했다. 공포심 보다 상위에서, 양심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 행정 문제라는 개념이 우선 수용되는 것을 나는 보았다. 나는 사람들이 타인들에게 양심을 넘겨주고, 양심을 넘겨 줄 기회를 얻고 나서 타인에게 고마워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저런 기억을 가지고 있던 나에게 밀러의 『시련』이 <야동 순재>옹의 연출로 무대에 올려진다는 이웃 형님의 광고를 보고서는 무조건 봐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그래서 오늘 그 계획대로 잔뜩 기대에 부풀어 형님과 형님의 친구분, 그리고 내 후배 하나와 똘래똘래 세종문화회관 M 씨어터에서 연극을 관람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이었을까 연극을 보는 내내 나에게는 “시련”의 시간이었다.

이 연극을 무대에 올렸던 배우들의 모습에서 정말 적잖이 실망이 되었다. 중간중간 대사가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은 다반사였고 허겁지겁 대사를 처리하는 모습이나 어색한 연기는 원작 작품에 비해 너무한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극의 1/3이 지나가던 시간부터는 내 정신이 거의 비몽사몽하는 지경까지 이를 정도로 지겨웠었고 한 10분 정도는 거의 숙면을 취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극의 마지막에는 솔직히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연기에는 누구보다도 베테랑인 <야동 순재> 옹께서 이 작품을 정말로 연출했나? 그런데도 저 정도면 큰 일인데?”

혹시 나만 이런 생각을 했었나 하는 생각에 후배에게 극이 끝난 후에 물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후배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리고 세종문화회관을 나와 형님과 형님의 친구분, 후배와 넷이서 커피 한 잔 하며 연극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거의 합의점에 이를 정도로 이 연극은 기대 이하였다. 형님 덕분에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연극을 관람했지만 그것마저도 아까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 연극의 미덕은 있었다. 다름 아닌 아서 밀러의 작품이 발표될 당시 미국에 몰아닥쳤던 매카시 열풍 못지 않게 우리 사회를 휩쓸어가고 있는 화마를 빗대어 볼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종북 마녀사냥” 말이다.

어쨌든 이 연극의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주인공이었던 John Proctor(존 프락터)의 마지막 대사는 연극이 주고자했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제대로 기억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락터의 대사는 이랬다. 

“그건 내 이름이니까요! 내 평생에 다른 이름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오. 내가 거짓말을 했고 또 그 거짓말에 서명을 했기 때문이요! 내가 처형될 사람들의 발 끝의 먼지만도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오! 이름도 없이 나보고 어떻게 살란 말씀이오? 내 영혼을 당신께 넘겼으니 내 이름만은 남겨 놓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