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머리에서 손으로

연평도 주민들의 한을 생각하는 밤...




근래 들어 인터넷 기사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는 곳이 Twitter이다. 엊그제부터 트윗터에 거짓 정보들이 떠돈다는 페이퍼 신문이나 인터넷 신문들의 기사가 떠들어댔지만, 그만큼 정보의 양이나 질이나 그렇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반증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든 오늘 트윗터에서 보았던 기사가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그 중 하나가 연평도 섬 주민 1200여명 전원이 삶의 터전을 떠나 육지로 나왔고,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으니 찜질방에서 지내라고 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피가 꺼꾸로 솟는 줄 알았다. 사실 여부를 떠나 도대체 저런 이야기들 자체가 회자 된다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또 하나는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에 따르면 “미국 시민 10명 중 7명이 한국에서 곧 전쟁이 발발할 것으로 본다”는 기사였다. 그리고 연평도 사건이 있은 다음 날 독일에서 유학하고 있는 한 후배가 내 Facebook에 그런 댓글을 남겼었다. “아침에 독일뉴스 톱기사였었다.” 정말 우리만 빼놓고 다 아는 사실이고 남들 앞에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저런 소식들을 접하면서 내 트윗터이건 페이스북이건 연일 내가 하는 일이라곤 명박이 욕에 국가 욕이었다. 남들 보면 무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아니 어쩌면 명박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왜 명박이만 욕하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근데 내 눈에는 명박이가 병신이라서 생긴 일이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 남북 문제를 이 따위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고 사회가 이 모양이 되도록 병신 짓거리만 해 온 것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의 전부이다. 이렇게 쓰면서도 욕 나온다. 명박이 씨발 병신새끼...

하여간 학교 행사도 마치고 후배 두 명과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 떨고 기숙사에 들어와 페이스북을 열었는데 후배 하나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2008년 MB 취임 > 촛불 정국 > 최진실 사망 > 잇단 연애인 사망 > 용산 참사 > 김수환 추기경 서거 >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 강희남 목사님 서거 > 김대중 전 대통령 서거 > 법정 스님 서거 > 천암함 침몰 > 문수 스님 소신공양 > 김준일 지부장 분신 > 연평도 포격.
기억에 떠오른 것만 나열해 보았다. 이 외에도 아마 많을 것이다. 이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 이유로 죽어 갔지만, 이번 정권은 유난히 이 일들을 세어보게 된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네이트에 적는 이 문구도 점점 몸에 익숙해 가는 씁쓸한 느낌. 서로의 상관이 없는 사건 일지 모르지만, 왠지 뭔가 있을 것같다...... 뭔가가;;;;;;

글을 찬찬히 읽으면서 가장 먼저 머리 속에 떠오른 단어가 ‘한’(恨)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슴 아팠던 글귀가 밑줄 그은 곳이었다. 누군가의 죽음에 익숙해져 간다는 말이 가슴을 철렁 내려 앉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 나라가 어떻게 가고 있는 것인지... 누군가의 죽음이 마치 일상이 된 것 같은 이 시대, 이 정권...

이렇게 쌓여가는 죽음의 한들을 도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싶다. 어쩌면 죽어야 할 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북이라는 존재의 공격에 의해 죽음의 공포를 맛보았고, 그런 공포 속에서 자신이 속한 국가는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함. 북한이건 남한이건 이들에게 국가는 폭력적 존재들로 다가왔을 것이다. 나약한 사람들에게 가하는 폭력자들로 말이다. 주민들께 이런 경험은 평생을 따라다닐 “Trauma”(트라우마)가 아닐까 한다.

존경하는 선생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사람을 밖에서 보면 육체이고 안에서 보면 혼이듯이, 민중도 밖에서 보면 민중이고 안에서 보면 그의 혼에 해당하는 한이다. 즉 민중의 문제는 한이다.”(서남동, 민중신학의 성서적 전거,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43)

저렇게 아무런 안전 장치도 없이 폭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된 저 연평도 주민들께서 느낀 한과 무력감은 도대체 누가 위로해 줄 것인가 하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애굽에서 학대받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신음소리, 최저생계비도 받지 못하는 근로자들의 신음소리, 무직에서 범죄로 다시 죄수로 떨어져 국민이라는 울타리 밖으로 추방당한 소외계층의 신음소리, 여리고로 가는 길에서 백주에 강도를 만나 사경에 이른 사람들의 신음소리, ‘고문, 조롱, 결박, 투옥, 불 속에 던져지고 돌로 맞아 죽고 … 양과 염소의 가죽을 몸에 두르고 질질 끌리며 학대받으면서 토해내는 울부짖음’(히브 11,34-38), 광야 산중 암혈 토굴에 버려진 한의 곡성, 곡식을 거둔 농민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의 소리 … 이 소리가 지금 땅에 가득 찼다.”(서남동, “소리의 내력”,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118)

그렇기에 연일 떠들어대고 있는 국가나 조중동의 기사와 같이 죽어야 할 적에 대한 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리고 유리하는 나그네처럼 되어 버린 주민들의 한과 아픔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땅에서부터 하늘에 호소하는 아벨의 피소리(창세 4,10)를 대변하고,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나 뺏기고 얻어맞는 이웃의 신음 소리를 듣고 그 아픈 상처를 싸매주고, 일꾼들에게 지불되지 아니한 품삯이 하늘에 들리도록 외치는 소리(야고 5,4) … 이 ‘소리의 내력’을 밝히는 한의 사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서남동, “한의 사제”, 『민중신학의 탐구』[서울: 한길사, 1983], 43)

주민들의 가슴 속에 묻혀 있는 한의 소리의 내력을 드러내 주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한다. 적을 만들어 한을 더 쌓는 일이 아니라...

“한풀이에는 부당한 억눌림, 말 못할 억울한 사정을 풀어야 한다고 해서 오히려 그것을 무마하고 망각하게 하고 해소하고, 그래서 마음이 후련해지게 하는 역할을 강구하는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종교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죠. 그러나 단순히 여기에 그치면 한풀이는 아편의 역할 이상이 아닐 것입니다. 자칫 그것은 불의한 권력을 연장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종교가 민중의 한풀이에 그친다면 생명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부당한 체제는 영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서남동, 『민중신학의 탐구』, [서울: 한길사, 1983], 200)

선생님의 말씀에 그리스도교의 역할이 있다는 생각을 하는 밤이다. 불의한 이 체제가 영속하도록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폭력 앞에 무력한 사람들을 위해 울어주고 그 폭력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