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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한국에서 서구 학자의 이론에 대한 수용사를 공부할 때 어려움 철학적 해석학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인 "영향사"나 "수용사"에 대해 관심이 많다. 영향사와는 조금 성격이 다른 수용사의 경우는 사실 문헌들을 옆에 쌓아놓고 지지고 볶고 해야 하는 작업이다. 해석사에 가까운 작업이다. 수용사의 특성상 특히 서구 학자들 중 손에 꼽히는 학자들을 연구해야 하는 작업은 더욱 그렇다. 그 학자의 이론을 그 당시를 지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영향을 받고 수용해 왔는지를 본다는 건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문헌 자체가 많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그런 성격에서 저술된 책들을 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최근에 알게 된 "The Oxford Guide to the Historical Reception of Augustine"이라는 책을 한 번 봐야.. 더보기
하이데거의 시인 하도 번역이 이상해서 하이데거의 원전을 봤다. 그리고 내가 번역을 해보았다. 똑같이 이상하다. 뎅장. ㅋㅋㅋ 하이데거 할배를 언제쯤 이해할 수 있을까? 늬믜. ㅋㅋㅋㅋㅋ “예언자는 언제나 이미 보고 있었다. 앞서 보았기에 그는 앞을 내다본다. 그는 현재완료형(Perfektum)으로부터 미래형(Futurum)을 본다. 시인이 예언자의 환상으로 본 것에 대해 말할 때, 시인은 예언자가 이전 과거에서 본 것을 말해야만 한다. 예언자가 미리 보았던 것은 무엇일까? 분명히 그것은 오직 그의 시야를 관통하는 빛 속에 현-존하는(an-wesen) 것이다. 그와 같은 봄에 의해 보이게 되는 것은 오직 은폐되지 않은 것 가운데 현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현존하는가? 시인은 다음과 같이 삼중적인 것을, 즉 존재하는 .. 더보기
고향, 어머니의 자궁일까?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를 읽으면 읽을수록 하이데거 할배가 자꾸 생각난다. 하이데거 할배의 책들은 하도 어려워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아 뭐라 말하기도 부끄럽지만, 하이데거 할배가 현대를 일컬어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정의한, 바로 그 정의가 온갖 고생을 겪으면서도 자신의 고향 이타케와 그의 아내 페넬로페와 아들 텔레마코스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오뒷세이아』의 오뒷세우스”¹와 겹쳐진다.혹시 하이데거 할배가 오뒷세이아에 대해 뭐라도 한 마디 했을까 싶어 논문들을 찾아봤지만 역시나 없었다. 하이데거 할배가 하나 쓸만도 했을텐데 왜 쓰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했다. 하기야 고대 그리스 철학에 대한 하이데거 할배의 평가가 그럴 생각도 못하게 했을 수도 있겠다 싶다.어쨌든 고향이라고 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