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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마키아벨리 대 마르크스, 그래서 얻는게 뭡니까?


전유(專有, Appropriation)라는 단어가 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일본식 번역어가 아닌가 싶다. 많이 쓰이는 단어인데, 가끔 저 단어를 번역해 놓고 나면 참 난감할 때가 많다.

어쨌든 통상적 어법에서는 자기 혼자만 사용하기 위해서, 흔히 허가 없이 무언가를 차지하는 일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문화연구에서 전유는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인수하여 그 문화자본의 원(元) 소유자에게 적대적으로 만드는 행동을 가리킨다. 전유가 꼭 전복적일 필요는 없지만 그렇게 사용될 때도 많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재전유(re-appropriation)라는 말은 문화연구에서 중요성하게 여겨진다. 재전유는 재의미작용(re-signification), 브리콜라주(bricolage)와 동의어로 쓰인다. 이것은 한 기호가 놓여 있는 맥락을 변경함으로써 그 기호를 다른 기호로 작용하게 하거나 혹은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행위를 수반하는 것이다.

문화연구자들은 자본주의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세계에서는 모든 대상이 생산 과정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정해진 운명대로 이미 상품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부르주아의 지배에 저항의 신호를 보내려면 하위집단은 상품을 소비하기는 하되, 그 상품이 시장에 나온 본래의 목적과는 다른 방식으로 이를 소비한다. 전복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가장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그룹은 페미니스트들과 동성애 옹호 그룹일게다. 기존 사회에서 정의된 여러 개념들을 전유하거나 재전유하므로 기존 개념들을 전복시키거나 해체시키는 작업을 수행한다. 사실 이런 식으로 작업을 수행하는 그룹들은 수도 없이 많다.

하여간 이렇게 서설이 길었던 것은 올 해가 니콜로 마키아벨리가 그의 군주론을 탈고한지 500주년이 되는 해라서 여기저기서 행사들이 열리면서 각 집단들은 나름대로 마키아벨리를 전유 혹은 재전유하는 모습들이 보여서 하는 말이다. 뭐 새롭게 해석한다고 하면 될 것을 굳이 나 스스로도 잘 이해 못하는 요상한 단어를 사용한 것은 각 집단들이 마키아벨리를 전유하면서 기존 개념들을 전복 혹은 해체하거나 혹은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보여서 그렇다. 결국 전유 혹은 재전유의 의도가 무엇이냐를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한국의 어느 노 학자 두 분이 마키아벨리를 전유하는 방식이 흥미롭게 보인다. 어떤 학자는 이런 말을 했다.

“마르크스에게는 사회적 구조만 있다. 그에겐 사회적 세력과 구조적 문제가 중요하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에게는 ‘살아있는 사람’이 있더라. 세력과 구조를 만든 인물이 있더라. 사람이 있는 정치와 사람이 없는 정치는 다르다. 정치에 사람이 들어갈 때 비로소 생명이 도는 느낌을 받는다.”

또 어느 학자는 인터뷰에서 이런 논리를 펼쳤다.

“마키아벨리의 정치학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정치 현실을 초월한 이상적 윤리규범이나 신앙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마키아벨리를 최초의 근대적 정치철학자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왜 그럴까요. 권력과 폭력, 그리고 악의 문제를 현실적 차원에서 생각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본 겁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폭력·악과 같은 것들을 정치의 영역에서 배제돼야 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어요. 정치의 기준을 윤리규범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권력이라는 현실은 정치의 출발점입니다. 폭력과 악을 정치를 실천하는 하나의 조건으로 간주했지요. 그 조건들을 다루는 게 정치고, 정치를 통해 공공선을 이룩해 가는 것입니다. 애초에 현실을 초월한 유토피아를 설정해 놓고 그리로 몰고 가는 것은 혁명이지 정치가 아닙니다. 마키아벨리는 도덕이나 규범에서 좋은 정치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플라톤을 한번 보세요, 정치와 윤리가 혼합돼 구분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는 플라톤 계열이지요.”

“마르크스 이론의 치명적 결함은 정치의 역할이 없다는 점이지요. 마르크시즘이 현실 속에서 작동을 못하고 실패한 이유는 거기에 있어요. 정치는 없이, 이상과 규범만 강요됐기 때문에 권력의 문제를 잘 다룰 수 없었지요. 그런 이상과 당위의 논리는 우리에게 넘쳐요. 오늘 한국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그런 규범이 아니라 좋은 정치를 이끌 실력이라고 봐요.”

한국 학계 노년의 두 거장이 마키아벨리를 전유하면서 왜 마르크스와 대비시키는 것일까?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뭔 이득을 보겠다는 것인가? 이게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고 꼼수로 보인다는 말이다.

그리고 저들의 논리가 마르크스를 제대로 이해하고 나온 말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저들의 마르크스 이해는 1960년대 이후에 등장한 마르크스 정치관에 대한 비판적 노선을 충실히 따르는 앵무새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사회비판 사상은 그의 비판적 분석이 인간의 생산활동을 중심으로 한 것이며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정치이론으로서 보다는 주로 정치경제학이론으로 이해되어왔다. 또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제도의 철폐와 정치의 지양이라는 마르크스의 사회적 혁명관은 일반적으로 계급투쟁을 통한 정치권력 장악이라는 정치관으로 해석되어왔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의 정치이념은 자본주의 사회극복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서 따라서 궁극적으로 지양되어야 할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일반적 해석에 근거하여 1960년대 말엽 이후 마르크스 사상에 대한 많은 비판은 마르크스의 생산 패러다임이 갖는 경제주의적 측면에 집중되었으며, 그러한 맥락에서 정치이념의 부재, 혹은 정치학의 부재로서 제기되어왔다. 이와 관련하여 마르크스의 정치관에 대한 아렌트(H. Arendt) 할매의 비판은 그 정치이론이 바탕하고 있는 인간관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전체적으로 제기된 것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르크스의 정치개념에 대한 아렌트의 비판은 마르크스가 인간의 행위를 노동 중심으로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진정한 조건으로 재건해야 할 공적 영역인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을 오히려 소멸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는데 있다. 그 결과 마르크스에게서 정치는 사회적인 것(the social)만이 부상된 근대사회의 경제 동물(animal laborans)적 삶을 보장하는 임무로 축소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하버마스(J. Habermas) 옹도 이러한 맥락에서 마르크스의 사상이 생산 패러다임에 기초한 것이므로 결코 그 사상 내부에서 '정치'의 규범적 토대를 설명해낼 수 없다는 점을 근본적 한계로서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이러한 종류의 비판은 이미 1930년대 루카치와 코르쉬에 의해 제기되었던 레닌과 플레하노프의 정통 맑스주의에 대한 비판과 마르크스 사상의 재해석이라는 흐름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은 그들만의 주장이라기보다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반에 지배적이었던 경제주의적 마르크스 해석에 대한 20세기 중 후반의 일반적인 비판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로울 것이 없다는 말이다.

또한 1970년대에서 80년대에 걸쳐 보비오(N. Bobbio)를 비롯한 서구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도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정치학의 부재로서 표현해왔다. 보비오와 체로니 등에 의해 맑스주의에 정치학은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제기가 이루어진 이후, 마르크스 사상 안에서 정치의 문제, 혹은 국가론이나 민주주의론을 둘러싼 논의는 하나의 논쟁을 이루면서 활발히 전개되었었다.



이러한 시도들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의 정치관에 대해 가해졌던 정치이념의 부재라는 비판이 해명된 것이 없었다는 점이다. 즉 이러한 논의들은 마르크스주의 정치학과 국가론에 대한 많은 분석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모두 마르크스의 정치 개념을 권력장악을 위한 계급투쟁의 장으로 해석하였으며, 그러한 점에서 그것들은 마르크스에게 정당한 정치의 이념이 부재하다는 아렌트와 하버마스의 비판을 근본적으로 해명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저 두 노 학자의 말이 내게는 개뿔 뜯어먹는 소리로 들린다는 것이다. 얼치기 주제에 두 노 학자에게 감히 할 말은 아니지만 내게는 그렇다. 그냥 솔직히 툭까고 왜 이런 식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고 있는지나 속 시원히 밝히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쌓아 온 명성을 하루 아침에 박근혜에게 갖다바치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말았으면 싶다. 

아~ 욕 나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