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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충실한 것과 자연스러운 것 중에 어떤 것이 좋은 번역일까?


독일어 책을 읽다가 한참 이해가 안 되는 문장이 있으면 종종 영어로 번역된 책들을 읽곤 했었다. 그런데 독일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책을 읽다가 보면 "왜 이렇게 말이 다르지?" 하는 생각에 고개 갸우뚱거릴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너무 심하게 의역을 해놔서 독일어 책과 아예 다른 뜻으로 비춰지기도 했었다.

이 부분이 너무 궁금해서, 자칭 명문대 국어영문학과 출신 후배에게 물어보니 "미국이나 영국 사람들이 다른 언어의 책을 영어로 번역할 때 자연스러운 영어 문장을 추구해" 하는 대답을 해 주었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그제서야 가지고 있던 의문이 풀렸던 경험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좀 심하다 싶을 때가 많다.

어쨌든 그 후배가 해 주었던 말의 역사적 기원을 이야기해 주는 책을 한 권 읽고 있다. 형님 한 분이 강추하셨던 책인데, 병원 다녀오다가 참새가 방앗간 그냥 못 지나간다고 헌책방엘 들렀는데 그 책이 눈에 띠길래 냉큼 업어 온 것이다. 번역가 <이희재>씨가 쓴 『번역의 탄생』(서울: 교양인, 2009)이라는 책이다.

그 책에 보면 왜 영국이나 미국 사람들이 "원문에 충실한 것보다 자연스러운 번역문을 더 높이 평가하는 전통"이 생겨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기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이렇게 다른 언어, 르네상스 이후 유럽에서 그리스 고전을 자국어로 자연스럽게 번역하는 전통이 제일 먼저 생겨난 곳은 프랑스라고 한다. 유럽에서 가장 먼저 중앙 집권 국가와 절대 왕정의 틀을 갖추고 강국으로 부상한 프랑스는 차츰 자기 문화와 자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커지면서, 그리스어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높아졌다고 한다.

그래서 신국 논쟁도 벌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 신구 논쟁은 17세기 말부터 18세기 초에 고대문학과 근대문학의 우열을 둘러싸고 프랑스에서 벌어진 논쟁으로 그때까지 프랑스를 지배하던 고전주의, 고대 그리스문학이 우월하다는 입장이 쇠퇴하고 근대파가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던 논쟁이다. 즉 고대인들의 사상이나 문학보다 요즘 사람이 더 똑똑하고 문학도 더 아름답다는 측의 주장이 승리하게 된 논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시작된 고전 문학에 대한 생각은 그 당시 공용어였던 라틴어를 밀어내고 프랑스어가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영국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영국 귀족들은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고전 작품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고전어보다는 영어에 충실한 번역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감은 신대륙 정복과 산업 혁명을 거치면서 영국이 유럽의 새로운 맹주로 떠올라 해가 지지 않는 나라가 되었고, 2차 대전 이후에는 미국이 초강대국의 지위를 누리면서 영어가 세계 공용어가 되면서 더욱 확고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영어로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대우는 높은 반면에 번역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대우는 그리 높지 않고, 혹시나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라도 다른 언어의 뜻에 충실한 번역보다는 영어의 흐름에 잘 어울리는 번역을 추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나라 언어의 뜻이야 어찌 되었든 그리고 그 흐름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영어에 충실한 번역을 하는 전통이 굳게 서 있다는 말이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맑스 할배 『Das Kapital』(자본)의 서문 번역을 살펴보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맑스 할배의 『자본』을 번역한 영어판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Sonnenschein(이하, SS)판이고 또 하나는 Penguin Classics이라는 출판사의 Ben Fowkes(자본론 1에 해당, 이하 BF)판이 있다. 한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DK) Die Arbeit, deren Nützlichkeit sich so im Gebrauchswert ihres Produkts oder darin darstellt, daß ihr Produkt ein Gebrauchswert ist, nennen wir kurzweg nützliche Arbeit.

(SS) The labour, whose utility is thus represented by the value in use of its product, or which manifests itself by making its product a use value, we call useful labour.

(BF) We use the abbreviated expression 'useful labour' for labour whose utility is represented by the use-value of its product, or by the fact that its product is a use-value.

처음에야 맑스 할배 『자본』을 김수행 서울대 명예교수께서 번역하신 것을 읽어갔다. 그러다가 뜻이 안 통하는 구절들이, 물론 번역 문제가 아니라 내 이해력 문제이다, 때문에 영어판을 구해서 읽는데, 유명했던 Penguin Classics의 Ben Fowkes의 번역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번역은 자연스러운 것 같은데 가끔 이게 뭐지 하는 것들이 보여서 결국 맑스 할배 원전을 이리저리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서문의 구절들을 비교해 보는 무식한 작업을 딱 한 번 해본적이 있었다. 위의 영어 두 문장 모두 뜻에서 그렇게 멀어진 것은 아니다. 다만 SS판이 독일어 문장에 충실한 번역이고 BF판은 영어식으로 번역된 것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BF판은 내가 볼 때는 맑스 할배가 강조하고자 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간 것이 아닌가 싶다. 

극히 짧은 독일어 실력으로 맑스 할배 원전을 번역해 보면 다음과 같을게다.

"그것의 유용성이 생산물의 사용가치에 있거나 혹은 그 생산물이 그 안에서 사용가치임을 나타내는 노동을 우리는 간단히 유용노동이라고 부른다."

앞뒤 문장들까지 다 읽어야 소유격으로 사용된 것들이 무엇인지 알 일이지만 저 문장만 놓고 보면 번역은 저렇다. 

저 말에 대해 조금 부연 설명을 하자면 맑스 할배는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 가치라는 이중성을 가진다고 말했다. 이와 대응에서 상품에 투하되는 노동도 이중적으로 파악했다. 상품을 사용대상(사용가치) 봤을 때 결부되는 노동을 할배는“구체적 유용노동”이라고 불렀고, 반대로 상품을 가치로 봤을 때 결부되는 노동을 “추상적 인간노동”으로 보았다. 

상품을 사용대상(사용가치)으로 봤을 때 결부되는 유용노동이란 유용성이 그 생산물의 사용가치로 표현되는 노동 또는 그것의 생산물을 사용가치로 만들어 스스로를 표현하는 노동이다. 저고리와 아마포가 질적으로 다른 사용가치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들을 만들어 낸 노동도 질적으로 서로 다른(재봉노동, 직포노동)노동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런 차이가 그 둘의 존재이유이자 그 두 생산물이 교환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어떤 사용가치가 동일한 사용가치와 교환되는 일은 없다. 따라서 다양한 사용가치(저고리, 아마포...)들의 총체는 다양한 유용노동(재봉, 직조...)들의 총체 즉 사회적 분업을 반영한다. 이렇게 보면 각 상품의 사용가치는 '자연소재와 노동'이라는 두 요소의 결합이라는 것이다.

번역 이야기하다가 또 이상한 길로 빠져나왔는데, 하여간 다른 언어에서 자신의 언어로 번역할 때는 자국어의 어법에 맞게 번역되는 것이 백 번 생각해도 백 번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필자가 의도하는 것에서 비껴가거나 강조점이 달라지는 번역이 자국어의 어법에 맞다고 해서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다. 

이렇게 쓰고 보니 또 영어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아닌가 싶다. 그래 난 영어가 싫다. 미쿡도 영쿡도 싫고 말이다. 그렇다고 독일이 좋은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외쿡어는 다 싫다. 

난 한국말이 제일 좋다. 닝기리~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