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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역사적 사회, 사회의 역사 - 소광희 교수의 [인간의 사회적 존재의미]를 읽는다


소광희 교수, 한국 철학계의 산 증인이자 거목이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번역하기도 했고, <존재와 시간 해설서>도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하이데거를 전공하고 있는 절친의 말에 따르면 한국 철학계에 하이데거 연구의 최고라고 하는 한국외대 이가상 교수의 <존재와 시간> 번역본보다 소광희 교수의 번역본이 더 가독성이 좋다고 했다. 어쨌든 이런 분을 두고 천재라고 하지 않나 싶다.

재미있는 점은 얼마 전에 모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야동 순재] 옹께서 서울대 철학과 54학번이라는 것이 밝혀졌었는데, 소광희 교수가 [야동 순재] 옹과 동기이거나 한 학번 빠르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비교해 놓고 보니 기분이 묘해지기도 하고 자꾸 웃음이 난다. 소 교수와 야동 순재 옹은 어떤 사이었을까 하고 자꾸 상상이 가서 더 웃긴다.

하여간 어느 날은 서점에 갔을 때 "어라~ 이 책이 날 기다리고 있었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지난 주에 어려운 일을 주위 분들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수중에 돈이 다 없어졌을 때 책 한 두 권 정도 구입할 여력이 있었다. "그래, 먹는데 쓰지 말고 책이나 구입하자"는 마음으로 서점을 향했다.

늘 하던대로 인문학과 철학, 사회학 책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는데 가판 위에 올려져 있던 책도 아니고 가판 아래 책꽂이에 쳐박혀 있는 것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음? 뭔 책이지?" 하고 주워들었다가 소광희 교수가 쓴 책이라는 사실과 목차와 관심 가는 부분을 훑어보고는 다른 책들에게는 더 이상 눈길도 주지 않고 그냥 업어 왔다. 이렇게 책 무식하게 사는 인간도 드물겠지만 그냥 그랬다.

소 교수는 머리말에서 이렇게 서술한다.

“사회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루면서 지속해오는 조직이다. 사회라는 말 속에는 역사성이 함축되어 있다. 이 양자는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어서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는 역사적 사회이고 역사는 사회의 역사이다. 그런 사회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나는 줄여서 사회 존재론이라고 한다. 이것을 '인간의 사회적 존재의 의미'라고 풀어서 책의 제목으로 삼았다. 나의 사회 존재론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는 사회에 대한 기본 구상이다.”(5)

그리고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 그러나 사회를 퇴락한 세인의 사회로만 보면, 그곳이 인생을 성취시키기도 하고 패배시키기도 하는 터전이라는 사회의 진면목이 드러나지 않는다. 사회를 세인의 사회로만 보면 독단적 유아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설령 사회가 세인이 지배하는, 진리를 은폐하는 면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곳을 떠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회가 혼탁하다면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회를 정화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6)

또한 이 책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 나는 이 저술에서 새 시대의 인류 평화를 위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모색하고자 한다. 나는 먼저 이상적 사회 모델과 비교적 실현 가능한 공동체 형태를 역사 속에서 찾아 구상의 발제 자료로 삼고, 그것을 실현하고자 앴는 노력들을 소개할 것이며, 또한 그 실현이 불가능한 현실적 원인과 이유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우리 삶을 질서 있게 운영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 규범의 철학적 근거도 검토할 것이다.”(7)

머리말을 읽고서는 “아~” 하는 신음소리와 함께 읽어서 손해 볼 일은 절대로 없겠구나 싶었다. 

머리말에서 밝힌대로 소 교수는 현재까지 "이상 사회"를 이야기했던 다양한 역사적 이론들을 추적해간다. 고대 중국, 플라톤, 토마스 모어의 이야기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사회계약론자들에게로 시선을 돌려 그들이 구상했던 이상적 근대 국가에 대한 이론들을 살펴보고 있다. 

그러면서 사회계약론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이 사회계약론을 통해 우리는 몇 가지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 홉스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보이듯이 민중이 야만적으로 이기적인 경우에는 절대 권력을 가진 군주제가 가장 적합하다. 단, 그가 자기 이익만을 노려서 권력을 남용하거나 국민을 괴롭히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위해 봉사할 각오가 되어 있을 때 그 나라가 번영할 수 있을 것이다. 개발 독재는 저개발국에서는 때로 필요한 것이다. 독재라고 해서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다. 국가가 계획적으로 발전하려면 독재가 필요한 경우도 있다. 농업 국가인 소련이 중화학 공업 국가로 전환한 것도, 중국이 시장경제를 통해 갑자기 발전 것도 독재에 힘입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독재가 국리민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55-56)

요 대목에서는 “어라~ 이거 뭐지?” 했지만, 역사적 사실을 서술한 것이기에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을 “국리민복”에 두었다는 것에서 한 발 물러서기도 했다. 참 애매모호한 말이기도 하고 “어떻게?” 하는 질문이 반드시 따라붙는 말이라 적잖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역사상 독재자들이 “국리민복”을 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비판점으로 충분히 읽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불편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소 교수는 그 다음으로 인간 세상에서 “영원한 비원”이라는 제하에서 “자유와 평등”을 논하고 있다. 처음에는 “비원”이라는 말이 한 번에 와닿지 않아서 애를 먹기는 했지만, 곰곰히 생각해 보고 나서 사전을 찾아보니 한자로 “悲願”이었다. “꼭 이루고자 하는 비장한 염원이나 소원”이라는 뜻이었다.

소 교수의 책에서 밑뿌리가 되는 “영원한 비원: 자유와 평등”이라는 부분에서 왜 이 두 개념이 인간이 살아가는 사회가 시급하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이루어야 할 개념인지를 소개한다. 이 부분에서는 먼저 인류사에서 자유를 위해 어떻게 투쟁해 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해 간다. 다시 말해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싸워왔는지를 보여줌으로 이 자유가 인류가 실현해야 할 덕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제3장에서는 “평등 이념의 구현을 위하여”라는 제목으로 전체 장을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할애하고 있다. 분량을 더 늘인다면 마르크스주의 역사에 대해 훌륭한 한 권의 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만 소 교수의 시선이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는 곱지 않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현대의 정치적 해결책은 복지다. 그러나 민주정 체제하에서의 복지는 포퓰리즘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민주정은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선출하는데, 그러자면 지도자로 선출되고자 하는 자는 가능한 한 많은 표를 얻기 위해 선거민들에게 말의 선심을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금권과 선동이 난무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국민의 현명함이다. 이성적으로 계발된 국민은 그것이 포퓰리즘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다. 평등을 실현할 수 있는 현대적 방법은 현명한 국민을 양성하는 것이다.”(204)

사실 이 부분에서도 또 한 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틀린 말 한 군데도 없지만 왠지 공허한 느낌으로 점철되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 교수가 이 부분에 각주를 달아놓으면서, “이것과 관련해서는 이 책의 5장 III절 ‘경제적 평등의 문제: 박애주의 경제학’을 참조할 것”이라고 했기에 4장은 읽지도 않고 5장을 건너 뛰어가 그 부분을 읽어보았다.

소 교수의 핵심은 이것으로 생각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본질을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 수정은 자본주의 체제를 그냥 두고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그런 수정은 1%의 부자들에게 맡기는 것인데 그들은 이익의 최대 확보라는 본능을 버리고 뼈를 깎는 자기 수정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최근에 자본가 자신의 입에서 그 수정의 불가피성이 토로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사회주의에 맡길 수도 없다. 그들은 무산자 계층에게 재산을 고루 분배하는 데 주력할 텐데 그렇게 되면 생산성이 저하되어 결국 재산 자체가 고갈되겠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께 거지가 되는 길이다. 우리의 수정 목표는 생산성 증가와 균등 분배를 다 같이 보장받는 것이다.”(248).

이 부분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을 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후에 등장하는 몇 가지 개념들이 더 있는데, 요 부분들에 대해서는 혹시나 이 책을 읽을 분들이 계시다면 그 분들께 맡기고 싶다. 다만 나로서는 소 교수가 바라보눈, 제3장에서 마르크스주의 역사를 서술하면서 보였던,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드러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소 교수는 부록 격으로 “세계 평화를 위한 종교의 기여”로 이 책의 거의 절반을 할애해 세계 종교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다. 그리스도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 마치 세계 종교사를 쓴 것 같은 부분이다. 그런데 소 교수가 철학자라서 그런지 이 부분의 결론을 이렇게 맺고 있다.

“종교가 인간의 가장 깊은 심정과 의지에 뿌리박고 있는 데다 제각기 독자적 교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쉽게 극복되지 않을 것이다. 종교 간의 소통을 도모하려는 시도는 결코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이 점에서 나는 종교보다는 인간 이성을 믿는 편이다.”(406)

사실 읽다가 빵 터졌다. 철학의 거목이시니 어쩔 수 없는 지적이기도 하시고 현대 사회의 종교를 바라보는 한 지성인의 시각이 이렇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도 있었다. 쉽게 말하면 세계 평화에 종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로도 바꿀 수 있을 것 같다. 어쩌겠나 싶다. 실제로 그런 걸 말이다.

어쨌든 여러 부분에서 도움도 되고 실망도 적잖은 책이었지만, 세계 전체와 거기에 종교 자체를 인문학 혹은 철학적 시각에서 조망할 수 있는데 도움을 주는 책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또한 소 교수의 학문적 뿌리가 <존재론>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읽는다면 받아들일 것도 비판할 것도 많기에 훌륭한 책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