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그늘에 앉은 책들

빌헬름 라이히, 계급과 욕망 해방을 위해 몸을 던졌던 이론가


내일이면 추석을 맞이해 부산 가는 길을 예비하기 위해 지붕 수리를 하려고 몇 년째 이용하고 있는 이발소를 향해 갔다. 그런데 이게 뭔 일인지, 점심에 먹었던 뭐가 잘못됐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화장실을 가야 하는 비상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나의 전동휠체어는 어느 새 학교로 진격하고 있었고 평안한 시간을 맞이했다. 뎅장. ㅋㅋㅋ

그렇게 학교를 나오는데, 한시적으로 사용할 행사용 책자를 만들어야 하는 일을 형님 한 분과 맡았는데, 그 형님을 정문 앞에서 딱 하고 마주쳤다. 학교 앞 편의점에서 음료수 마시며 이리저리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책자 준비를 위해 도서관에서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지붕 수리를 하기 위해 먼저 일어나섰다. 그리고는 한 시간 가까이를 수리에 전념했다. 

수리를 마친 후 형님과 도서관에 입성해 책들을 둘러보고 있는데, 오래 전에 읽다가 관둔 책이 눈에 똬 하고 들어왔다. Wilhelm Reich(빌헬름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책이었다. 이사 몇 번 하는 통에 누님 집으로 책을 보낼 때 거기에 파묻혀 간건지 잃어버린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하여간 사라진 이후로는 읽지 못했었는데 다시 보니 반가워 냉큼 업어왔다. 

예전에 처음 이 책을 읽을 때도 그랬지만 다시 몇 쪽을 이리저리 훑어 있다가 빵빵 터지는 글들이 있어 혼자 히죽거리고 있다가 예전부터 한 번 정리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미뤄뒀던 글을 하나 끄적거려 본다. 라이히의 이 책은 읽으면서 왜 그렇게 웃음이 나는지 잘 모르겠다. 라이히가 보았던 지점에 나도 너무 감정이입이 되어서 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어쨌든 서구 사상의 흐름에서 중요한 두 축을 언급하라고 한다면 맑스주의와 프로이트주의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 두 축이 생겨난 이래로 이 둘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20세기의 서구 학문사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왔다고 해도 그렇게 과장된 것은 아닐게다. 20세기 후반기에 들어서는 독일보다는 프랑스에서 특히, 푸코, 들뢰즈, 가타리를 중심으로 이 문제가 더욱 치열하게 연구되었다. 

이 두 축은 현실 사회 속에서는 국가와 가족이라는 두 받침대를 가지고 이 사회를 지탱해 왔다. 그러나 우스꽝스럽게도 계급 해방이라는 모토 아래 계급 지배 장치인 국가를 전복시키려던 맑스주의는 국가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또한 욕망 해방을 통해 인간 해방을 추구했던 프로이트주의는 가족 삼각형으로 모든 사람들의 목을 졸라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빌헬름 라이히(1887-1957)에 의해 이 두 축을 결합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라이히가 이 두 축을 결합하려던 목적은 분명했는데, 현존 사회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려는 것이었다. 라이히는 기계론적인 맑스주의와 문화론적인 프로이트주의를 공격하고 계급 해방과 욕망 해방을 줄기차게 추구해 왔다. 

라이히가 주목했던 것은 계급 해방 담론에 의해 억압된 욕망 해방이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라이히는 동시에 배척당했다. 세상사 무엇인가 이질적으로 보이는 둘을 결합시키려고 했던 사람들이 죄다 그러했듯이 라이히도 그랬다는 말이다. 어쨌든 라이히는 더 이상 복종하지 않고, 더 이상 자신을 기죽이지 않는 주체들과 건강한 주체들과 자유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끊이없이 자신의 이론을 펼쳐갔던 뚝심 강한 학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일반적으로 라이히의 경력은 세 단계로 요약된다고 한다. 첫 단계는 1918년 빈 대학에 입학하여 프로이트의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이른바 ‘정신 분석 2세대’를 형성했던 시기이다. 두 번째 시기는 1928년부터 1933년까지 맑스주의 정치의 일환으로 성-정치(Sex-Pol) 운동을 전개하던 때였다. 마지막으로는 외국으로 전전하면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1939년 미국에 최종적으로 정착하여 ‘오르곤 에너지’를 발견하고 그에 관한 과학적 실험에 집중하던 시기라고 한다.

특히 라이히가 가장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성 정치 운동 시기는 정신분석과 맑스주의를 접속하여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 관계(특히 계급 관계)와 결부시켰다. 그런데 앞서 잠시 언급도 했지만, 라이히의 주장이 혁명적인 만큼 그에 대한 평가는 극에서 극이었다. 또한 오르곤 연구에 집중하던 만년의 라이히는 황당무계한 사상에 사로잡힌 미치광이로 취급되기도 했다.

시대를 너무 빨리 타고 태어난 덕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든다. 뭐 웃자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그냥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이 정신과 뭄 건강에 최고일듯하다. 그래서 난 아직 건강하다. ㅋㅋㅋ

하여간 오늘 읽다가 빵 터졌던 부분이 있어서 그냥 아예 통째로 4쪽 정도를, 노니 장독 깬다고 옮겨 보았다. 그런데 가만히 읽어보면 이게 굉장히 기독교를 희화화 하는 것이라 조금 조심스럽기도 하지만 이건 비단 기독교만의 문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유교전통이 강한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현실적합성이 있는 것 같다.

---------------------------------------------------------------------

“한 청년노동자 단체는 개신교 목사 한 사람을 경제 위기에 관한 토론에 초청했다. 18세부터 25세 사이의 기독교 청년 20여 명이 그를 호위하면서 나타났다. … 여하튼 그는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입장을 취했다. 

그는 현재의 고통이 전쟁과 영 플랜¹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세계대전은 인간의 타락, 비열함, 부정, 죄악의 표현이며, 자본주의적 착취 역시 중대한 죄악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전형적인 입장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반자본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그런 반자본주의적 감정이 기독교 청년들에게 받아들여졌을 때, 그 영향력을 없애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이기 때문에 소련의 사회주의 역시 자본주의의 한 형태이며, 자본주의가 어떤 계급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처럼 사회주의 역시 다른 계급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따라서 우리는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를 “발릴로 걷어차야” 하며, 볼셰비즘의 종교에 대한 투쟁은 범죄행위이며, 종교는 비참함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잘못은 바로 자본주의가 종교를 오용한 데에 있다고(그 목사는 확실히 진보적이었다). 

위와 같은 주장에서 어떠한 결론이 도출되었는가? 그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비열하고 사악하기 때문에 인간이 처한 곤격은 제거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곤경을 참고 견뎌낼 수밖에 없다. 자본가 역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장 본질적인 곤경인 인간의 내적 곤경은 소련의 3차 5개년 계획이 완수된다 하더라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등등. 

그런데 몇몇 혁명적 청년들이 자신들의 입장을 주장했다. ‘고통’은 개별 자본가의 문제가 아니라 ‘체제’’의 문제이자 다수가 억압받고 있느냐 아니면 소멸되고 있는 소수가 억압받고 있느냐의 문제라고. 비차함을 견뎌내기 위한 방책은 단지 비참함을 연장하는 것으로 정치적 반동에게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할 뿐이라고. 

토론에 참석한 사람들은 서로 대립되는 관점을 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누구도 토론에 참석하면서 지녔던 신념을 바꿀 수는 없다는 점에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목사와 함께 왔던 청년들은 자기 지도자의 말을 추종했다. 그들의 물질적 상황은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빈곤했지만 그들 모두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없으니 그것을 감내하고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의견에 동조했다.

토론이 끝난 후 나는 청년 공산주의자들에게 왜 교회의 핵심문제, 즉 청소년들의 금욕에 대한 강요는 이야기하지 않았는지 물어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런 문제는 너무 위험하고 다루기가 까다로워서 폭탄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에 정치적 토론에서 그런 문제를 끄집어내는 것은 관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말이다.

이 토론이 있기 얼마 전에 베를린의 서부구역에서 대중 집회가 열렸는데 그곳에서는 교회의 대표자와 공산당의 대표자가 각각 자신의 관점을 발표했다. 그 집회에 참석한 1백 8백여 명 중 반 이상은 기독교인과 소시민계층의 사람들이었다. 그 집회 주요 연사로서 나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하여 성경제학적인 입장을 요약했다. 

1. 교회는 피임약의 사용이 자연적인 생식을 방해하는 다른 것들처럼 자연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이 엄격하고 현명하다면, 왜 자연은 사람들이 아이를 낳고 싶은 만큼만 성교하도록 만들지 않고 일생 동안 평균 2~3천 번 정도의 성교를하도록 성기관을 만들었는가?

2. 여기 참석한 교회 대표자들은 아이를 낳고 싶을 때만 성교한다고 공언할 수 있는가? (이 집회에는 개신교 목사들이 참석했다.)

3. 신은 왜 하나의 성기관에 두 종류의 선, 즉 성흥분을 위한 선과 생식을 위한 선을 만들었는가?

4. 왜 생식기능이 시작되기 훨씬 전인 어린 시절부터 성이 발달하는가?

교회 대표작들의 당황스런 대답은 폭소를 자아냈다. 교회와 반동적 과학의 쾌락기능 거부가 권위주의적 사회의 틀 속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하고, 성적 충족의 억압이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비하하도록 만들고 경제적인 것에 대한 체념을 일반화시킨다는 점을 명확히 하자 청중 전체가 나의 편의 되었다.

나는 대중 집회에서의 폭넓은 경험을 통해 성적 충족에 대한 권리가 의학적·사회학적으로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설명될 때 성적 억압과 관련된 신비주의의 정치적 반동적인 역할이 쉽게 밝혀질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193-195).

“성(聖)에 대한 집착 뒤엔 성(性) 앞에 무력감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더럽게 느끼면서 누르라는 세상에서 줄기차게 솟아오르는 성욕은 나를 괴롭히는 악마처럼 여겨지죠. 성욕을 정신으로만 누르려고 해봤자 대개는 실패하거나 히스테리를 앓을 수밖에 없습니다. 겉으론 깔끔한 척 굴지만 뒤로 돌아서선 호박씨를 까는 위선의 인간이 되기도 하고요.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성욕에 흔들리지만 그 흔들림을 멈출 수 없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면서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 죄인인지 끊임없이 고백하게 됩니다. 성욕을 억제당하도록 길러진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자신이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해줄 존재가 필요하게 됩니다. 신이 요청되죠.

종교적 인간은 실제로는 완전한 무력감에 빠져든다. 성적 에너지가 억압되기 때문에 그는 생활의 어려움을 처리하는 데 필요한 공격성뿐만 아니라 행복을 위한 능력도 상실했다. 그는 무력해질수록 자신을 보호해주고 도와주는 초자연적 힘의 존재를 더욱 더 믿게 된다. 

따라서 그가 몇몇 상황들에서 신념에 대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 즉 수동적이지만 결사적인 용기를 발전시킨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는 이러한 힘을 대단히 즐거운 육체적 흥분에 의하여 생겨나는 종교적 신념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창출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러한 힘이 ‘신’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믿게 된다. 그러므로 신에 대한 그의 열망은 사실 성적 이전-쾌락의 흥분에서 유래하여 발현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는 열망이다.”(220)

-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황선길 옮김 (서울: 그린비 출판사, 2012)

----------------

¹ Young Plan: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인 독일의 전쟁배상금에 대한 최종안(案)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