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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에 앉은 책들

서효인 - 인문대 소강당

인문대 소강당 

- 서효인


단상에는 오랜만에 햇빛을 밟은 칸트 선생이 험악한 인상으로 청중을 내려다보고 있다. 있다, 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일을 그는 경계했다. 독일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있다, 라는 말을 생각할수록 없다, 라는 말도 점점 못생겨졌다. 어딜 가나 지각하는 인간은 있고 그들은 허리를 한껏 숙이고 뒷문을 통해 들어와 빈자를 찾는다. 인간 고유의 정신을 망각한 짓이다. 핸드폰이 울린다. 칸트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본다. 조잡한 최신 가요의 음파가 강당의 바닥에서 천장으로 올라가 멀리 흩어지며 사라진다. 빌어먹을 학부생 같으니. 인간이길 포기한 원숭들은 목을 흔들며 느린 춤을 추고 있다. 있다, 라는 말에 대해서 헤겔 선생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있다는 것은 산다는 것과 같은 뜻이오. 뭐든 사야 있을 수 있거든. 건방진 헤겔 같으니. 황급한 동작으로 가방 속 화장품 사이 휴대전화를 찾는 학생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고 있다. 칸트는 목이 탄다. 단상에 물이 없다. 쿠키를 정렬하던 조교는 뒤풀이 자리를 예약하러 떠났다. 여학생이 전화를 귀에 대고 숙인 자세로 강당을 떠난다. 여학생이 있던 자리에는 두 덩어리 엉덩짝 자국만 있다. 뒤풀이 때문일까. 헤겔 선생보다 인기가 없다는 확고한 사실이 제본 교재처럼 펼쳐진다. 인기를 얻는 재주는 임용의 필수적인 덕목일지도 모른다. 모른다, 라는 말을 생각하다니. 칸트는 인간적 수치심을 느낀다. 느낀다, 라는 말을 곱씹다니. 칸트는 자신이 없음으로 인해 존재하고 있음을 지각한다. 내가 지각을 하다니. 그런데 왜 목이 타지? 토론자의 질문이 들리지 않는다. 오, 자네는 하이데거 아닌가? 아니요, 일전에 인사를 나누었는데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그렇군. 죄송하게 되었네. 저는 현대를 시를 연구하는 It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나는 Be로 있겠네. 칸트의 입에서 거짓말이 술술 나온다. 옷을 훌훌 벗는다. 오랜만에 햇빛이 옷을 벗는 칸트의 몸을 천천히 밟는다. 처음부터, 더럽게 못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