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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내면화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

1930~60년대까지 프랑스 철학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쳤던 독일 철학자들은 3H(Hegel, Husserl, Heidegger)이다. 하지만 1960년대가 넘어가기 시작하며 판도가 바뀌기 시작하는데 Marx, Nietsche, 그리고 Freud로 그 중심축이 이동한 것이다. 특히 Lacan 할배가 “프로이트로 회귀”라고 외치면서 프로이트의 영향력은 급속도 확산되어 갔다. 

이 라깡 할배가 주최한 정신분석학 세미나에 참석해 라깡 할배와 프로이트의 세례를 받은 현대 프랑스 학자들이 Louis Althuser, Michel Foucault, Gilles Deleuze 등이다. 이들이 라깡 할배에게 받았던 영향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 가장 큰 부분은 “우리가 ‘시니피앙’로 따로 떼어내려고 시도했던 어떤 것과 관련된 주체의 의존이 문제입니다.”는 것이다. 이게 푸코가 행했던 어느 한 강연에서 라깡 할배의 코멘트라고 하는데, 그냥 하는 말도 저리 어렵게 하니 한 때리고 싶지만, 어쨌든 라깡 할배의 요지는 인간의 “주체는 시니피앙이라고 하는 어떤 것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주체가 형성되는 것은 사람의 무의식이 언어와 같이 구조화 되어 있는 시니피앙에 의한 효과라고 한 것이다. “주체의 죽음”이 아니라 “구성적 주체를 구성된 주체성으로 전도하는 운동이고 주체를 탈구축하는 동시에 재구축하거나 또는 αρχη(아르케/원리, 원인, 기원)로서의 주체를 탈구축하는 동시에 효과로서의 주체성을 재구축하자”는 말이다. 쓰고 나니 나도 뭔 말인지 모르겠지만, 주체가 무엇에 의해 형성되었는지 뜯어보자는 말이다. 라깡 할배는 시니피앙의 효과로 구성된 주체를 시니피앙의 내면화로 본 것이다.    

이렇게 라깡 할배의 세례를 받은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인 알튀세르, 푸코, 들뢰즈는 라깡의 시니피앙을 권력으로 치환하여, 주체를 ‘권력의 내면화 효과’로 본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들만의 독특한 ‘권력이론’을 전개해 갔다. 알튀세르는 호명과 이데올로기적인 재인/오인으로, 푸코는 규율적 장치들 즉 학교, 병원 등에 의해 실현된 권력의 투여로, 들뢰즈와 가따리는 자본주의적 가족 체계에 의한 오이디푸스적 복종화의 권력 이론을 주장한 것이다.    

문제는 이들의 권력이론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고 드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이론으로 어떻게 권력에 의한 내면화 혹은 복종화된 주체화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수 있느냐의 것이다. 사실 나도 라깡 할배로부터 정착하기 시작한 ‘구조주의적’(이 용어도 딱히 와닿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사용한다) 사유 체계를 넘어서려는 ‘포스트 구조주의적’ 사고 체계로 어떻게 권력에 저항할 수 있을까 하는 회의감이 많았다. 그런데 라깡 할배를 아주 조금씩 이해해가면서 저 세 명의 권력이론들도 아주 조금씩 이해되어 가고 권력저항의 이론들도 아주 조금씩 이해되는 것처럼(잘못 이해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기에) 느껴진다.    

어쨌든 늦지 않을 시간 후에는 저 세 명의 권력저항 이론들에 대해서도 끄적거리게 되지 싶다. 간절한 바램이기도 한 부분이기도 하다. 얼마나 걸릴지는 자신이 없다는 것이 서글프다. 뎅장.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