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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1968년 5월과 2013년 6월 - 대학의 시국선언을 바라보는 한 시선

대학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이라는 것을 하는 것이 몇 년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어쨌든 서울대를 시작으로 이화여대, 연세대, 고려대 등등 줄줄이 시국선언을 했거나 준비하고 있단다. 비유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뭐가 뛰니 뭐도 뛴다고 반시국선언을 하자는 말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일베들은 또 신이나서 이번 시국선언이 어쩌네 저쩌네 난리부르스를 추고 있다. 그리고 또 한 쪽에서는 총학의 시국선언이네 일반 학생들은 걱정을 하고 있네 하는 식으로 호도한다. 대학의 전체 학생의 의견도 아니고 일부 학생회를 장악하고 있는 좌경화된 총학생회의 이름으로 시국선언을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논리이다. 또 일부는 더 큰 일들이 있었는데 왜 이번건만 가지고 시국선언을 하냐고 욕을 하기 시작했다.

다까끼 마사오나 다까끼의 똘마니들인 두환이나 태우 시절에는 철저하게 언론이 통제 당해 시국선언 자체가 큰 여파가 되던 시절이었지만, 권력의 통제가 먹혀들지 않는 인터넷 언론이 발달하고 SNS가 언론 이상의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대학 이름의 시국선언이 별 효과가 없다는 쪽의 이야기도 있다. 말 자체만 놓고 본다면야 그리 틀린 말도 아니기도 하다. 현 정부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비판적인 시각이 있다면 뭐가 옳고 그른지는 시국선언이 아니라도 금새 알 수 있는 문제이니 말이다.

하지만 현재 대학의 시국선언이 정말 그런가는 한국 사회의 대학이 걸어 온 길을 뒤돌아 보며 따지고 봐야 할 문제이다. 한국 사회가 1987년을 기점으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하는 듯으로 보이면서 대학은 우리 사회에서 좌표를 가리키는 기능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취업을 위한 학원으로 전락했고, 그 궁극점에 다다른 것이 몇 년 전 'ㄱ' 대학의 한 여학생이 이러한 대학 사회를 비판하는 대자보를 붙이고는 자퇴한 사건이었다. 지성의 전당이니 상아탑이니 하는 말은 전설의 고향이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체 대학생의 의견은 아닐지라도, 학내에서 권력을 장악한 좌익의 총학생회가 선언한 것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긍정성은 아무리 이야기해도 민망하지 않다. 한국 사회 구성원들이 교육 수준이 낮아서 대학생들이 시국선언을 해야 인식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다. 일부에 불과할지 모르지만 나는 이번 시국선언이 대학이 주체의식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쯤되면 또 한 번 68혁명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에서의 68혁명 사건이 이랬다. 1968년 3월 미국 베트남 침공에 항의해 <아메리칸 익스프레스>의 파리 사무실을 습격한 대학생 8명이 체포되자 그 해 5월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발생했다. 칸대학과 파리대학 낭테르 분교의 학생 시위가 정부의 탄압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이러한 정부의 조치에 분개한 각지의 청년과 근로자들이 합세하며 시위의 물결이 거대해졌다. 총 400만 명이 파업과 공장 점거, 대규모 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이들은 정부가 대학교육의 모순과 관리사회에서의 인간 소외, EC(유럽공동체) 체제하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해결해 줄 것을 주장하면서 일어난 혁명이었다.

독일은 어땠는가? 1962년 10월 8일 월요일,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에는 ‘팔렉스 62’ (Fallex 62)라는 나토 군사훈련 내용을 분석한 ‘제한된 방어력’ (bedingt abwehrbereit)이란 제목의 기사가 실리게 된다. 22쪽 분량의 이 기사는 팔렉스 62 훈련이 사실은 ‘구소련이 독일에 핵폭탄을 투하할 경우 서독에게 어떠한 피해가 나타나는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라고 폭로한 기사였다. 당시 ‘콘라드 알러스’ 기자는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은 서독 국방부의 관련문서 등을 참조해서 이 기사를 쓴 것이었다.

기사를 내보내고 2주가 지난 10월 26일 저녁, 슈피겔 사무실에는 독일 연방경찰의 수사관들이 들이닥친다. 이들은 압수수색 영장을 제시하고 사무실을 뒤지는 한편, 발행인 ‘루돌프 아우구슈타인’과 ‘콘라드 알러스’ 등 5명의 기자를 구속한다. 이들에게 적용된 혐의는 국가기밀 누설죄와 공무원 매수죄였다.

당시 국방장관이던 ‘프란츠 요세프 슈트라우스’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서독 국방부의 스캔들을 여러 번 폭로했던 슈피겔 발행인 ‘루돌프 아우구슈타인’과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던 차에 슈피겔의 기사에서 복수의 기회를 얻었던 것이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슈피겔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냉전의 한 가운데, 전 인류를 핵전쟁의 공포로 몰아넣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슈피겔의 보도 직후인 10월 14일, 중거리 미사일의 발사대가 쿠바에 건설 중인 것을 공중촬영으로 확인한 미국은 쿠바에 대한 해상봉쇄 조치를 선언하고 있었다. 대서양에서는 미사일을 실은 소련 화물선이 쿠바를 향해 항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데나워’ 총리까지 연방 하원에 나와 슈피겔지에 보도에 대해 “반역 행위”로 본다는 발언을 하게 된다. 당시 슈피겔의 재정 상태는 그야말로 위기상황이었다고 한다. 몇 주일간이나 편집국을 점령하고 있는 경찰 때문에 슈피겔의 발행은 차질을 빚고 있었고, 이런 상태가 계속된다면 독자들도 광고주도 떨어져 나가 결국 문을 닫게 될 것이 분명했었다.



그런데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독일 전역에서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독일 국민들에게 슈피겔 사건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공권력의 부당한 폭거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독일 국민들은 아우구슈타인이 투옥된 형무소로 몰려와 "아우구슈타인을 풀어주고 슈트라우스를 감금하라"고 외쳤다. 길거리에서 국가안보와 언론자유에 대한 토론이 이어지고, 대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왔다. 

따라서,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가부장적인 아데나워 정권은 나치 정권과 다를 바 없는 독재 체제로 인식되었다. 여기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호르크하이머(1895~1973)와 아도르노(1903~1969)를 중심으로 한 '비판 이론'은 이들 청년과 지식인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비판 이론'으로 무장한 이들에게 기존의 문화는 시대 착오적이고 현상 유지에만 집착하는 교양 없는 구시대의 산물로 인식되었다. 대부분 좌파였던 아데나워 시기의 지식인들은 권위주의적이고 종교적인 편향된 애국심 등을 비판하면서 아데나워를 에스파냐의 독재자 프랑코 장군에 비유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당시의 상황을 극명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특히, 1967년 이란의 팔레비 국왕이 베를린을 방문하는 것을 반대하기 위한 학생들의 집회에서 오네조르크(1940~1967)가 경찰에 의해 사망하면서 젊은이들의 저항은 더욱 과격해졌다. 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맹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연좌 농성과 토론 집회, 파업이 연일 계속되었다. 1968년에 2500명의 회원을 보유하게 된 사회주의 독일 학생 연맹은 기성 정치계에 대하여 "모두 날씨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는 구호를 앞세워 '의회 밖의 저항'이라는 정치 조직을 결성하고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개시했다. 1968년 4월에 당시 대표적인 학생 지도자였던 두치케(1940~1979)가 베를린에서 우익주의자에 의해 공격을 당해 목숨이 위태로운 사태가 발생하자 서독 내의 우익과 좌익 간의 반목은 절정에 다다른다.

이것이 유럽의 대표적인 두 나라, 프랑스와 독일에서 일어났던 68 혁명의 대강이다. 이 혁명의 물결에서 프랑스와 독일의 대학들이 했던 역할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7-80년대 우리 대학가에서는 이보다 더한 대학생들의 시위와 저항이 있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90년대는 그 자취를 감춘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이번 대학의 시국선언에 거는 기대가 나름대로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모순과 부정의에 저항하는 모습으로써의 대학의 모습 말이다. 5월을 지나 이제 6월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다. 한 여름 따거운 햇볕과 같이 우리 대학의 뜨거움을 바라는 것은 너무 섣부른 것일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기대를 버리고 싶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