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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말 사이의 삶들 “아픈 데는 없냐고 당신이 물었다.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말과 말 사이의 삶들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병률, 『눈사람 여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13)시인들의 감수성이란 이런 것인가보다 싶다. 더보기
정호승 - 서울의 예수 시인 정호승은 1970, 80년대 대학가 주변을 중심으로 널리 사랑받는 이 땅의 대표적인 신진 시인의 한 사람으로 각인되었다. 이 시기 그의 시는 우리 사회 내부의 소외받은 계층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현실의 비극에 대한 비판적 감성에 기반을 두고, 이로부터 추출된 민중적인 주제와 정서를 서정적인 방식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그의 시적 특성은 산문적인 표현 방식의 확대를 통해 현실 비판적 인식을 강조하고자 했던 대다수 당대 참여 시인들의 경우와 는 확실히 다른 점이 있다. 즉 그의 시는 현실에 대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서정시 본연의 요건과 태도들을 포기하지 않은 경우이다. 그래서 초기에 발표된 그의 시들이 대중의 폭넓은 이해와 사랑을 얻게 된 데에는 이와 같이 조화롭고 균형.. 더보기
정호승 - 외나무다리 외나무다리 - 정호승 둥근 달이 떠 있다짐을 내려놓아라푸른 별이 떠 있다길을 건너라그대와 나의 깊은 계곡팽나무로 만든 이나무다리 위를반가사유상이 괴었던 손을 내리고조심조심 걸어서 간다짐을 내려놓아라무겁지 않으냐눈물을 내려 놓아라마르지 않았느냐 더보기
박성우 - 봄소풍 봄소풍 - 박성우 봄비가 그쳤구요햇발이 발목 젖지 않게살금살금 벚꽃길을 거니는 아침입니다더러는 꽃잎 베어문 햇살이나무늘보마냥 가지에 발가락을 감고 있구요아슬아슬하게허벅지 드러낸 버드나무가푸릇푸릇한 생머리를 바람에 말리고 있습니다손거울로 힐끗힐끗버드나무 엉덩이 훔쳐보는 저수지.나도 합세해 집적거리는데얄미웠을까요, 얋미웠겠지요힘껏 돌팔매질하는 그녀. 손끝을 따라 봄이 튑니다 힘껫 돌팔매질하는 그녀신나서 풀짝거릴 때마다입가에서 배추흰나비떼 날아오릅니다나는 나를 잠시 버리기로 합니다 더보기
박남준 - 봄날은 갔네 봄날은 갔네 - 박남준 봄비는 오고 지랄이야꽃은 또 피고 지랄이야이 환한 봄날이 못 견디겠다고환장하겠다고아내에게 아이들에게도 버림받고 홀로 사는한 사내가 햇살 속에 주저앉아 중얼거린다십리벚길이라던가 지리산 화개골짜기 쌍계사 가는 길벚꽃이 피어 꽃 사태다앞서거니 뒤서거니 피어난 꽃들 먼저 왔으니 먼저 가는 가이승을 건넌 꽃들이 바람에 나풀 날린다꽃길을 걸으며 웅얼거려본다뭐야 꽃비는 오고 지랄리야 꽃대궐이라더니사람들과 뽕짝거리며 출렁이는 관광버스와쩔그럭 짤그락 엿장수와 추억의 뻥튀기와 뻔데기와동동주와 실연처럼 쓰디쓴단숨에 병나발의 빈 소주병과우리나라 사람들 참 부지런하기도하다그래그래 저렇게 꽃구경을 하겠다고간밤을 설랬을 것이다새벽차는 달렸을 것이다 연둣빛 왕버드나무 머리 감는 섬진강가 잔물결마저 눈부시구나언.. 더보기
김금용 - 오월의 숲에 들면 오월의 숲에 들면 - 김금용 어지러워라자유로워라신기가 넘쳐 눈과 귀가 시끄러운오월에 숲에 들어서면 까치발로 뛰어다니는 딱따구리 아기 새들까르르 뒤로 넘어지는 여린 버드나무 잎새들얕은 바람결에도 어지러운 듯어깨로 목덜미로 쓰러지는 산딸나무 꽃잎들 수다스러워라짖굳어라한데 어울려 사는 법을막 터득한 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물기 떨어지는 햇살의 발장단에 맞춰막 씻은 하얀 발뒤꿈치로 자박자박 내려가는 냇물산사람들이 알아챌까봐시침떼고 도넛처럼 꽈리를 튼 도룡뇽 알더미들도룡뇽 알더미를 덮어주려 합세하여 누운하얀 아카시 찔레 조팝과 이팝꽃 무더기들홀로 무너져 내리는 아기똥풀 꽃더미에 쌓여푸르게 제 그림자 키워가는 오월의 숲 몽롱하여라여울져라구름발을 뒹굴다둥근 얼굴이 되는오월의 숲엘 들어서면 더보기
송재학 - 안 보이는 사랑 안 보이는 사랑 - 송재학 강물이 하구에서 잠시 머물듯어떤 눈물은 내 그리움에 얹히는데너의 눈물을 어디서 찾을까정향나무와 이마 맞대면너 웃는데까지 피돌기가 뛸까앞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처럼너의 길은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길내 눈동자에 벌써 정향나무 잎이 돋았네감을 수 없는 눈을 가진 잎새들이못박이듯 움직이지 않는 나를 점자처럼 만지고또다를 잎새들 깨우면서 자꾸만 뒤척인다네나도 너에게 매달린 잎새였는데나뭇잎만큼 많은 너는나뭇잎의 不滅을 약속했었지너가 오는 걸 안 보이는 사람이 먼저 알고점점 물소리 높아지네 더보기
서효인 - 인문대 소강당 인문대 소강당 - 서효인 단상에는 오랜만에 햇빛을 밟은 칸트 선생이 험악한 인상으로 청중을 내려다보고 있다. 있다, 라는 말을 함부로 쓰는 일을 그는 경계했다. 독일인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다. 있다, 라는 말을 생각할수록 없다, 라는 말도 점점 못생겨졌다. 어딜 가나 지각하는 인간은 있고 그들은 허리를 한껏 숙이고 뒷문을 통해 들어와 빈자를 찾는다. 인간 고유의 정신을 망각한 짓이다. 핸드폰이 울린다. 칸트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고 천장을 본다. 조잡한 최신 가요의 음파가 강당의 바닥에서 천장으로 올라가 멀리 흩어지며 사라진다. 빌어먹을 학부생 같으니. 인간이길 포기한 원숭들은 목을 흔들며 느린 춤을 추고 있다. 있다, 라는 말에 대해서 헤겔 선생은 다른 입장을 갖고 있다. 있다는 것은 산다는 것.. 더보기
정일근 - 신문지 밥상 신문지 밥상- 정일근 더러 신문지 깔고 밥 먹을 때가 있는데요어머니, 우리 어머니 꼭 밥상 펴라 말씀하시는데요저는 신문지가 무슨 밥상이냐며 궁시렁 궁시렁 하는데요신문질 신문지로 깔면 신문지 깔고 밥 먹고요신문질 밥상으로 펴면 밥상 차려 밥 먹는다고요따뜻한 말은 사람을 따뜻하게 하고요따뜻한 마음은 세상까지 따뜻하게 한다고요어머니 또 한 말씀 가르쳐 주시는데요 해방 후 소학교 2학년이 최종학력이신어머니, 우리 어머니 말씀 철학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