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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부터의 사색

승질머리와 글의 강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이상 말보다는 글이 편하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생각해 봤다. 글이라는 것에 맛을 들인 기회가 있었다.

내가 70년 초반 생이니 위로 누님들은 죄다 60년대 생이시다. 첫째와 둘째 누님은 국졸, 셋째 누님은 고졸, 넷째 누님은 전문대졸이었다. 근데 셋째와 넷째 누님은 그 당시 여상(여자상업고등학교)를 다니셨다.

여상을 졸업하고 회사 취직을 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목(?)이 “일반상식”이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컴퓨터나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책으로 모든 걸 해결했던 때였다. 당연히 상식책이 유행하던 때였고 그게 매년 내용을 증보하거나 모양새를 다듬어 출판되었다.



누님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시자마자 상식책이 집에 넘쳐나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그건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그냥 신기한 내용들이 많아 아무 생각없이 읽었다. 역사, 사회, 과학 등등 오만잡다한 것들을 다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러다가 중학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과학에 대한 글짓기 대회가 있다고 글을 한 편씩 써 내도록 했다. 나야 상식책을 싸고 살았으니 읽은 거 중에 하나 골라서 진짜 원고지에 기억을 더듬어 써서 냈다. 지금 기억해 보니 아마 “반도체”에 대한 내용이었던 것 같다.

상식책에서 읽었던대로 사실에 근거한 정말 드라이 한 내용이었다. 근데 이게 반에서도 뭔 상을 받고 학교 전체에서도 상을 받는 기적이 일어났다. 반에서 상을 주신다고, 그 당시 여자 담임 선생님이셨는데, 내 이름을 두 서너 번 부르셨는데, 설마 그게 내 이름이라고는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멍 때리고 있다가 선생님께 혼나기도 했다.

근데 이게 무슨 부산 지역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학교 대표로 나가야 하니 또 글을 쓰라는 거 아닌가. 우와, 그때부터는 정신이 혼미해지고, 여자 담임 선생님이 또 국어 선생님이셨던지라 첨삭 지도까지 해주시면서 뭔 대회를 준비했었다. 아, 진짜 그때는 어디 도망가 숨고 싶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부산 뭐에서도 찌그마한 상을 하나 받았긴 받았다. 그때 참 힘들었지만 글을 쓴다는 게 뭔지 글을 통해서도 뭔가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뭐 그렇다고 그 이후로 글을 쓰는 공부를 하거나 스스로 연마를 하지는 않았다. 글을 쓴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느낌을 가진 게 거의 전부였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것이 사실에 기반한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는 걸 배우고 멈춘 것이다.

그 버릇이 아직도 남아서 글의 깊이가 없고 정보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런 글쓰기 형식은 공적인 글쓰기를 할 때 드러나는데 철저히 정보 중심의 글을 쓴다. 결론에 이르러서야 정보들을 종합한 내 이야기를 그저 몇 줄 더 하는 정도로 글이 마무리 되곤 하는데 내가 봐도 내 글 정말 재미없다.

그렇지만 반대로 이런 내 글쓰기 형식이 싫어서 사적인 글은 철저히 내 중심, 아니 내 주위에서 일어난 일들을 쓰려고 노력한다. 누구 이야기를 쓸 기회를 만들려고 하지도 않고 그럴 경우가 생기면 철저하게 내 경험이 아님을 밝힌다. 누구를 드러내고 욕을 하는 것도 되도록이면 안 하려고 한다.

나한테 일어나는 일들만으로도 차고 넘치고 할 이야기가 널려 있는데 남 욕할 시간도 이유도 잘 발견하지 못하겠다. 그런데 그렇게 내 이야기 하다가 보면 또 어떤 경우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와 만나게 되기도 한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사실 말이 좀 어눌하지만, 말을 하기 시작하면 좀 독하게 하는 편이라 상처를 많이 주는 성격이라 되도록이면 말을 줄이려고 한다. 글은 쓰다가도 수정할 수 있으니 그 강도를 조절할 수 있어서 좋아서 더 글 중심으로 의사소통으로 하려는 것 같다. 사실 말은 이게 한 번 나가버리면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니 더 주저하게도 된다.

그렇다고 글을 또 유하게 쓰지도 않는다. 승질이 올라오면 독한 글을 날리는 경우도 다반사라 요즘은 글 쓰는 것도 무서워진다. 사실 상처도 많이 주는 편이라 더 조심해야지 하는데 이 놈에 승질머리 때문에 조절이 안 될 때가 많아 걱정이기도 하다.

어쨌든 글의 강도를 조절하는 습관을 좀 더 철저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하기야 이건 강도를 조절하는 능력이 아니라 승질머리의 문제라는 생각이 든다, 뎅장.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