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머리에서 손으로

노동해방을 쟁취한 장애인?

노동은 신성한 것인가?그 신성한 노동을 거래하는 노동시장에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은 장애인들에 노동은 뭘까?


 그런데 노동해방이라는 말은 또 뭘까? 노동시장에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 장애인들은 노동해방을 쟁취한 것일까?


뭘까, 이 끊임없는 모순은?


5월1일이 보름남짓이다. 노동의 신성함과 노동해방이라는 모순 앞에 헛웃음을 짓게 된다.


장애인은 아무래도 맑스 할배의 노동해방을 쟁취한 존재로 규정하면 어떨까 하는 웃기는 생각을 해본다, 늬믜. ㅋㅋㅋ



“사람들이 ‘노동’을 찬미하고 ‘노동의 축복’에 대해 지치지 않고 말할 때 나는 … 모든 개인적인 것에 대한 공포를 본다. … 이런 노동이야말로 최고의 경찰이며, 그것이 모든 사람을 억제하고 이성, 열망, 독립욕의 발전을 강력히 저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느낀다. 왜냐하면 노동은 극히 많은 신경의 힘을 소모하고 성찰, 고민, 몽상, 걱정, 애정, 증오를 위해 쓰일 힘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작은 목표를 겨냥하면서 수월하고 규칙적인 만족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고된 노동이 끊임없이 행해지는 사회는 보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안전이 현재는 최고의 신성으로서 숭배되고 있다.”

- 니체, 『아침놀』, 박찬국 옮김(서울: 책세상, 2004), 191.


“자유의 왕국은 실제로는 필요와 외적 합목적성에 의해 결정되는 노동이 끝나는 곳에서 비로소 시작한다. 그것은 사물의 본성상 본래적인 물질적 생산의 영역 너머에 존재한다. ……이것은 여전히 필연성의 왕국일 뿐이다. 이 필연성의 왕국 너머에서 자기 목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계발, 즉 참된 자유의 왕국이 시작된다. 그러나 자유의 왕국은 필연성의 왕국 위에서 이것을 기초로 하여서만 번성할 수 있다. 노동시간의 단축이 기본조건이다.”

- 칼 맑스, 『자본론 3』, 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