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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서 손으로

억압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탈식민주의 이해하기


19세기부터 시작된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서구 백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제3 세계에 속하는 많은 아시아/아프리카 국가들은 식민지배라는 악몽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가 자생적인 저항으로 해방을 맞이하지 못하고 서구 국가들의 집안 싸움으로 인한 피비린내 나는 양차 대전을 통해 식민상황으로부터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찌보면 저항에 의한 해방이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더 비참한 상황을 초래하게 되었다.

특히나, 에드워드 사이드 할배의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밝혀진 바와 같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그들의 식민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들을 철저하게 연구했고 그러한 연구들을 바탕으로 다양한 비틀기를 시도했고 식민 지배 국가 국민들을 세뇌하는데 성공했다. 쉽게 예를 들면 “우리가 백인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당연한 역사적 결과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한 “이러한 비참한 옛 역사에서 벗어나 근대화를 이룩해 준 것은 서구 백인들의 공이다.”

저기에 서구 백인들이라는 말 대신 “일본”으로 대치하면 일본 식민 제국주의에 뼛속까지 물든 인간들의 이야기가 된다. 1945년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 해방은 해방이 아니었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성립된다. 해방은커녕 식민 지배 국가만 달려졌다는 논리가 성립하지만, 내가 딱히 좋아하지 않는 논리이다.

어쨌든 자의든 타의든 맞이하게 된 해방 세계를 살아가면서 피식민 지배 지식인들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그 해방은 해방이 아니라는 자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서구 백인 식민 지배 집단들이 비틀어놓은 자신들의 사회. 정치, 문화를 바로 잡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들이 들고 나온 말이 “탈식민주의”라는 용어였다.

이러한 탈식민주의자들이 탈식민을 수행하기 위한 전략은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하나는 서구 백인 식민주의자들이 비틀어 놓은 서구 백인 사회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읽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고색찬란하다 못해 비까번쩍 하는 것처럼 치장해 놓은 서구 백인 문화가 얼마나 허상인지를 까발리고, 또한 그들에 의해 비틀어진 자신들의 삶을 다시 읽어 보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전략은 “다시 쓰기”이다. 즉 서구 백인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된 자신들의 모든 것들을 그들 자신의 입장에서 다시 쓰는 것이다. 역사, 문화 등 전반에 걸쳐 자신의 정체성을 새롭게 정립하려는 노력이다.



그러나 내가 싫어하는 것은 탈식민의 바로 두 번째 전략인 “다시 쓰기”에서 “민족주의적 경향”이 아무런 이질감없이 너무 자연스럽게 개입된다는 점이다. 이렇게 개입되는 민족주의적 경향은 또 다른 식민지배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거 골때리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렇게 좁은 의미에서 탈식민주의의 외연을 좀더 확장시켜 보면, 일상에서 일어나는 권력에 의한 지배를 비판할 수 있는 시각을 열어주게 된다. 서구 백인 지배를 넘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권력 장치들에 대한 저항을 수행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을 제공받게 된다는 말이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부자들의 지배, 장애인에 대한 비장애인의 지배 등등의 지배 현상을 다시 읽고 다시 쓰기를 가능하게 하고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교두보를 만들 수 있다.

탈식민이라는 이론의 큰 그림은 대충 이런 데,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어떻게 다시 읽고 다시 쓸 것이냐의 문제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그럼에도 그 가치는 여전히 충분하고 앞으로도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특히나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권력으로부터 해방을 위해서 말이다.